ADVERTISEMENT

조선인 ‘설움의 땅’ 우토로에…평화기념관 문 열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일제 강점기 비행장 건설에 동원됐던 조선인이 살아왔던 교토부 우지시 우토로 마을의 역사를 알리고 평화를 염원하는 우토로평화기념관이 지난달 30일 개관했다. 김현예 도쿄 특파원

일제 강점기 비행장 건설에 동원됐던 조선인이 살아왔던 교토부 우지시 우토로 마을의 역사를 알리고 평화를 염원하는 우토로평화기념관이 지난달 30일 개관했다. 김현예 도쿄 특파원

지난달 30일 오전 9시 50분쯤 일본 교토(京都)부 우지(宇治)시 우토로 마을의 우토로 평화기념관 앞마당. ‘곧 개관식이 시작하니 자리에 앉아달라’는 안내 방송이 나오는데도 마을회장 서광수(74)씨는 계속 서성이며 몇 번이고 기념관을 바라봤다.

우토로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 당시 일본이 늪지에 비행장 건설을 시작하면서 생긴 마을이다. 당시 반강제로 조선에서 넘어온 노무자 1300여 명의 일부는 비행장이 반쯤 만들어진 45년 일본이 패전한 뒤로도 그곳에 방치됐다. 우토로 마을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조선에서 이주한 서 회장의 할아버지·할머니는 이곳에 계속 살았다. 서씨는 48년 교토 인근에서 5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나 한살 때부터 이곳에서 자랐다. 그의 어린 시절 우토로는 판잣집 마을로, 지붕은 비가 샜고 태풍이 오면 물이 무릎까지 차올랐다.

그의 큰 형은 집안에 돈이 없어 다니던 일본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담임 소개로 닛산 차체 조립공장에 취직했다. 1년쯤 다니다 우토로의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해고됐다. 담임이 다른 일자리를 소개했지만, 태풍에 집이 무너지자 돕겠다며 찾아온 회사 사람들에게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시 일자리를 잃었다. 서 씨는 “큰 형은 그런 차별 속에 한동안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살았다”고 했다.

2층에 재현된 거주 1세대 김군자 할머니의 방. 좌식 탁자와 달력까지 그대로 재현됐다. 김현예 도쿄 특파원

2층에 재현된 거주 1세대 김군자 할머니의 방. 좌식 탁자와 달력까지 그대로 재현됐다. 김현예 도쿄 특파원

우토로 사람들은 이를 악물고 일했고, 서씨도 그랬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돈을 벌기 시작해 결혼 뒤인 36세 때 이곳에 집을 지었다. 하지만 3년이 지난 87년, 땅이 우토로 사람들 것이 아니라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었다. 마을 회관에 뛰어가 보니 어머니 도장이 찍힌 서류가 있었다. 글을 못 쓰는 어머니가 속은 것이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 뒤 토지가 제삼자에게 매각되며 강제퇴거 소송이 시작됐다.

일본 시민단체가 나섰지만 2000년 결국 패소가 확정됐다. 주민들이 강제퇴거 위기에 처하자 한국 정부가 지원해 2010년 토지의 3분의 1을 사들였고, 일본 정부의 지원으로 그 땅에 아파트를 지어 주민들이 살게 됐다.

지난 2020년 고(故) 강경남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우토로에 뿌리를 내렸던 1세대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 남아있는 2세대들도 70대 고령자가 되면서 우토로의 기록을 남기고 싶어했다. 평화를 주제로 한 기념관 건립이 그렇게 추진됐다. 한국 정부의 지원으로 20억원을 들여 지상 3층, 전체면적 461㎡ 규모의 건물을 지었다.

건축은 우토로에서 나고 자란 주민이 맡았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조선인 노동자 합숙소인 함바(飯場) 한 채를 평화기념관 앞마당으로 옮겼다. 우토로 주민들이 만들었던 야구단의 사진과 소송 기록, 북과 장구, 꽹과리, 다듬이와 함께 1세대의 일본어 공부 자료, 불고기 석쇠 등을 보존했다.

지난 40여년간 우토로 지키기 운동을 해온 다가와 아키코(田川明子) 우토로 평화기념관장은 눈시울을 붉히며 “우토로 평화기념관 건립은 한국과 일본의 시민을 비롯해 양국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서 회장은 “한·일 양국의 젊은이들이 이런 역사 뿌리를 알고, 우토로 문제를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