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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들키면 해고"…81년 설움의 땅, 우토로에 기적이 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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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오전 9시 50분쯤 일본 교토(京都)부 우지(宇治)시 우토로(ウトロ) 마을에 있는 우토로 평화기념관 앞마당. “곧 개관식이 시작하니 자리에 앉아달라”는 안내 방송이 연신 나오는데도 마을회장 서광수(74) 씨는 자리에 앉질 않고 서성였다. “기념관이 문을 열게 돼 정말 감사하고 기쁘다”고 말하면서도 믿기지 않는 듯 연신 기념관을 몇번이고 바라봤다.

우토로는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 당시 일본이 교토 자위대 부대 옆 늪지에 비행장을 건설하기로 하면서 생겨난 마을이다. 당시 반강제로 조선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1300여명. 반쯤 비행장이 만들어졌을 때인 1945년 일본이 패전하면서 조선인들은 이 자리에 남았다.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들은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우토로 마을이다.

우토로에 산다는 것

우토로 평화기념관이 지난달 30일 문을 열었다. 기쁜 날이라고 차려입고 나선 서광수 우토로 마을 회장이 옛 조선인 합숙소인 '함바'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사진 교토=김현예 도쿄 특파원

우토로 평화기념관이 지난달 30일 문을 열었다. 기쁜 날이라고 차려입고 나선 서광수 우토로 마을 회장이 옛 조선인 합숙소인 '함바'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사진 교토=김현예 도쿄 특파원

비행장 건설로 인해 이주한 서 회장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우토로에 살았다. 서씨가 태어난 건 1948년. 교토 인근에서 5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나, 한살 때부터 우토로에서 컸다. 어린 시절 그의 기억에 있는 우토로는 판잣집 마을. 지붕은 비가 샜고, 태풍이 오면 홍수가 나 무릎까지 물이 차올랐다.

글자를 잘 모르던 어머니는 그의 주민등록을 할 때 그의 이름 중간자 광(光)을 잘못 써, 지(之)로 적었는데 그 바람에 이름이 ‘지수’가 되기도 했다. 자라면서는 10살 차이 나는 큰형 덕을 많이 봤다. 키가 180㎝가 넘는 데다 운동신경이 좋았는데, 싸움에선 지질 않았다. 우토로 아이들이 맞는다는 소문이 들리면 우르르 몰려가 손을 봐준 덕에 놀림을 당하진 않았다. 일본인 학교에 들어가 더러 ‘마늘 냄새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차별받는다는 생각은 하질 못했다고 했다. 형의 그늘 덕이었다.

우토로의 과거 사진. 수도 시설이 없어 지하수를 퍼올려 빨래를 하고, 음식을 해먹었다. 사진=우토로 평화기념관

우토로의 과거 사진. 수도 시설이 없어 지하수를 퍼올려 빨래를 하고, 음식을 해먹었다. 사진=우토로 평화기념관

큰 형은 집안에 돈이 없어 다니던 일본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담임 선생님 소개로 닛산 차체 조립공장에 취직했다. 1년쯤 다녔을까. 회사 사람들과 친해졌는데 집이 우토로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조선인이라는 것도 알려졌다. 그길로 형은 해고됐다. 그 뒤에도 담임 선생님이 일터를 소개했는데, 태풍이 왔다. 회사에 “태풍이 와서 집이 무너졌다”고 했더니 회사 사람들이 돕겠다며 집을 찾아왔다. 그길로 조선인이라는 것이 알려져, 또 한 번 일자리를 잃었다. 서 씨는 “큰 형은 그런 차별을 당해, 한동안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살기도 했다”고 했다.

우토로 사람들은 잘 뭉쳤다. 야구단을 꾸려 함께 놀았고, 학교 운동회 땐 서로 밥을 나눠 먹었다. 찻집에서 일하던 어머니는 운동회에 오질 못했는데, “어머니 일하느라 못 오셨지?”라면서 동급생 부모님이 그를 불러 주먹밥과 부침개를 나눠줬다.

우토로를 지킨 이유

우토로 사람들은 이를 악물고 일했다. 그 역시 그랬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돈벌이를 시작했다. 이후 결혼한 뒤 36세 때 우토로에 집을 지었다. 그러고 약 3년 뒤인 1987년 땅이 우토로 사람들 것이 아니란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었다. 마을 회관에 뛰어가 보니 어머니 이름으로 된 도장 찍힌 서류가 있었다. 글을 못 쓰는 어머니가 속은 것이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후 토지가 제3자에게 매각되며 강제퇴거 소송이 시작됐다.

일본 시민단체가 돕는다며 나섰다. 재판이 시작됐다. 마을 주민들은 돈을 모아 땅을 사보자 했지만, 대부분이 돈이 없었다. 한일 시민단체 도움으로 우토로 문제가 알려진 것도 이때였다. 2000년, 결국 패소가 확정됐다. 강제퇴거 위기에 놓인 이들에게 한국 정부가 지원했다. 2010년 토지 3분의 1을 사들였고, 일본 정부 지원으로 이 땅에 아파트를 지어 주민들이 살게 됐다. 상하수도도 없던 우토로를 나가 살 수도 있는데도, 우토로를 지킨 이유를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아무래도 주변이 조선사람이니까 마음이 편해서요. 나는 여기서 살아야겠다는 의식이 있었어요. 우토로의 역사가 있잖아요.”

우토로 평화기념관이 지난달 30일 문을 열었다. 기념관에 전시된 우토로 마을 인근 사진. 파랑색으로 칠해진 부분이 닛산차체 부지, 그 옆 노란색 부분이 자위대 부대 지역이다. 사진 교토=김현예 도쿄 특파원

우토로 평화기념관이 지난달 30일 문을 열었다. 기념관에 전시된 우토로 마을 인근 사진. 파랑색으로 칠해진 부분이 닛산차체 부지, 그 옆 노란색 부분이 자위대 부대 지역이다. 사진 교토=김현예 도쿄 특파원

4000만엔 거금 들고 온 노인도

이후 평화기념관 건립을 위해 한국 정부의 지원으로 20억원이 투입됐다. 지상 3층 연면적 461㎡ 규모로 새 건물이 지어졌다. 건축은 우토로에서 나고 자란 주민이 맡았다. 사들이지 못한 땅에 있던 집들은 속속 허물어졌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합숙소 함바(飯場) 한 채를 평화기념관 앞마당으로 옮겨왔다. 그 사이 지난 2020년 고(故) 강경남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우토로에 뿌리를 내렸던 1세대들은 모두 세상을 떴다. 남아있는 2세대들 역시 70대의 고령자가 되면서 우토로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평화를 주제로 한 기념관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곳엔 우토로 주민들이 만들었던 야구단의 사진과 소송 기록, 북과 장구, 꽹과리, 다듬이와 같은 물건들이 고스란히 남았다. 일본어를 몰라 공부했던 이들의 일본어 자료, 야키니쿠(焼肉) 석쇠도 보존됐다.

지난 40여 년, 우토로 지키기 운동을 해온 다가와 아키코 우토로 평화기념관 관장은 눈시울을 붉혔다. 우토로 평화기념관 건립이 “꿈만 같다”고 했다. 그는 한국과 일본의 시민을 비롯해 양국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단 설명을 전했다.

우토로 평화기념관에 재현된 우토로 1세대 고(故) 김군자 할머니의 방. 우토로 고령자들을 대신해 연금 소송을 내기도 하고, 강제퇴거에 맞서기도 했던 할머니의 방을 되살렸다. 사진 교토=김현예 도쿄 특파원

우토로 평화기념관에 재현된 우토로 1세대 고(故) 김군자 할머니의 방. 우토로 고령자들을 대신해 연금 소송을 내기도 하고, 강제퇴거에 맞서기도 했던 할머니의 방을 되살렸다. 사진 교토=김현예 도쿄 특파원

우토로 토지 매입에 돈이 부족하단 소식을 듣고 퇴직금을 가져온 분들, 도쿄에서 신칸센을 타고 거금을 전달한 분들 덕이라는 이야기도 꺼냈다.

지난 2007년, 재일교포 1세대인 한 할아버지가 찾아왔다. 작은 손수레에 종이봉투가 담겨 있었는데, 4000만엔(약 4억원)에 달하는 큰돈이었다. 지폐엔 은행 띠지가 둘려있지 않았다. 고무줄로 100만엔씩 묶여있었다. 다가와 관장은 “돈을 받아들고는 모두 감동해 울었다”고 했다. 따뜻한 손길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주변 마을의 일본인 주민들도 “내가 보낸 걸 말하지 말라”고 돈을 보탰고, 저금통을 들고 오는 어린아이부터 퇴직금을 쾌척하는 분들도 있었다.

다가와 관장은 “우토로에서 고달팠고, 슬펐고, 기쁨을 누렸던 이들의 흔적이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 두려웠다”며 “일본인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평화기념관이 생긴 것이 정말 기쁘다”면서 “다만 1세대들에게 이런 건물을 짓고, 우토로에서 평화를 알리는데 어떠세요 하고 묻지 못하는 것이 매우 아쉽다”며 눈물을 훔쳤다.

지난달 30일 문을 연 우토로 평화기념관엔 한국과 일본 양측의 취재진들이 몰렸다. 사진 교토=김현예 도쿄 특파원

지난달 30일 문을 연 우토로 평화기념관엔 한국과 일본 양측의 취재진들이 몰렸다. 사진 교토=김현예 도쿄 특파원

“역사 잊지 말아 주세요”

번듯한 우토로 평화기념관이 생겨났지만, 우토로 마을 주민들은 여전히 고민이 있다고 했다. 우토로 2세대들은 이미 고령인 데다, 젊은 3세대들은 모두 도회지로 떠나서다. 서 회장은 “평화기념관을 지키는 사람들은 현재 무료로 자원봉사하고 있다”며 “이들이 지속해서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내놨다. 그는“한·일 양국의 젊은이들이 이런 역사 뿌리를 알고, 우토로 문제를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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