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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의 매혹? 동굴 벽화마다 사람 손은 붉게 표현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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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6호 20면

컬러의 시간

컬러의 시간

컬러의 시간
제임스 폭스 지음
강경이 옮김
윌북

봄날이다. 자연 속 다양한 색이 눈을 간지럽힌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미술사학자인 지은이는 서문에 “매일 보는 것들이야말로 제대로 보기가 가장 어렵다”는 장 자크 루소의 말을 소개한다. 흔한 색에서 아름다움과 함께 의미를 찾고, 이를 부여한 인간의 내면을 살펴보겠다는 의도가 읽힌다.

지은이는 색이 인간 생리·감정과 끊임없이 대화한다고 강조한다. 파랑은 심장 박동은 물론 범죄마저 줄인다. 2006년 일본에서 전국의 철도 승강장·건널목에 파랑 LED 전등을 설치했더니 철로 자살률이 85%나 줄었다.

색채 심리학은 이미 생활 깊숙이 파고들었다. 가게들은 주의를 끄는 빨강·노랑을, 식음료 제품은 식욕을 돋우는 빨강과 오렌지색을 각각 선택한다. 은행·보험사가 정직·성실·확신·안정성을 떠오르게 하는 파랑을 선호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소비자들은 브랜드를 주로 색채로 인식한다.

클로드 모네의 ‘국회의사당, 갈매기’. 1870~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을 피해 영국 런던에 머물 때 그렸다. 보라색이 인상적이다. [사진 윌북]

클로드 모네의 ‘국회의사당, 갈매기’. 1870~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을 피해 영국 런던에 머물 때 그렸다. 보라색이 인상적이다. [사진 윌북]

하지만 개별 색채에 대한 인식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르다. 예로 미국 정치에서 보수는 빨강, 진보는 파랑으로 각각 상징되지만, 유럽에선 그 반대다. 검정을 서양에서는 오랫동안 암흑·절망·죄·죽음과 동일시했다. 고대 이집트인은 나일 강 삼각주의 검은 흙을 비옥함의 상징으로 인식했다. 죽음의 신 오시리스의 상을 검게 칠했는데, 사후 세계를 부활과 재생의 장소로 믿었기에 검정은 생명의 색이었다.

지은이에 따르면 검정이 죽음을 상징하게 된 건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거치면서다. 고대 그리스인은 고인에게 검은 짐승을 제물로 바쳤고, 로마인들은 죽음과 관련된 일이 생기면 검정에 가까운 옷을 입었다. 기원후 1세기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정적들을 연회장 벽, 시종들의 옷, 그릇은 물론 음식마저 새까맣게 꾸민 연회에 초대해 겁에 질리게 했다. 색채 정치다.

하지만 지난 100년간 패션 선구자들은 검정을 혁신과 유행의 대명사로 바꿔놓았다는 게 지은이의 설명.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모든 색 중 가장 편리하고 우아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가장 날씬하게 보이게 하는 색이고 안색이 나쁘지 않다면 사람을 가장 돋보이게 한다”며 “언제든, 나이와 상관없이 입을 수 있는 색”이라고 설명했다. 장례식에선 애도를, 파티에선 세련미를 나타낸다.

5세기 페르시아 세밀화 ‘일곱 초상의 방에 있는 바르함 구르’. 왕자가 결혼할 일곱 공주의 복장과 궁전을 각기 다른 색으로 묘사했다. [사진 윌북]

5세기 페르시아 세밀화 ‘일곱 초상의 방에 있는 바르함 구르’. 왕자가 결혼할 일곱 공주의 복장과 궁전을 각기 다른 색으로 묘사했다. [사진 윌북]

현대에 들어와 빨강은 피·사랑·생명·위험·분노·죄악·죽음, 그리고 혁명·저항을 상징하는 만능 은유로 사용됐다. 원시인에게도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일까. 1994년 프랑스 남동부 쇼베 동굴에선 약 3만 년 전에 인간이 남긴 사자를 포함한 수많은 동물 그림과 함께 사람의 손과 손바닥 자국이 400개 이상 발견됐다. 흥미로운 건 동물은 숯으로 검게 그렸지만, 손과 손바닥에는 붉은색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런 동굴 벽화가 스페인 같은 유럽은 물론 지리적으로 동떨어진 인도·동남아·아프리카·호주에 남미 남쪽의 파타고니아까지 발견되지만, 한결같이 인간의 손은 붉게 표현한다. 시공을 초월한 인간 고유의 특성을 가리키는 ‘행동 현대성’이 적용된 것일지 모른다는 게 지은이의 생각이다.

고대 문명에서 인간 창조 신화도 붉은색과 밀접하다. 구약성서 창세기의 ‘아담’은 히브리어로 빨강을 뜻한다. 땅·토지·육지를 의미하는 ‘아다마’나 피를 가리키는 ‘담’과 연결된다. 구약성서보다 1000년 전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엔릴 신화에 따르면 인류는 붉은 진흙 반죽에서 나왔다. 빨강은 인류의 근원에 가까운 색인가.

지은이는 노랑을 성명하면서 덴마크 태생의 아이슬란드 예술가 올라푸르 엘리아손이 2003년 영국 런던의 테이트모던 미술관 입구의 거대한 터빈실에 200개의 나트륨램프로 설치한 ‘태양’을 소환한다. 노랑은 상당수 문명권에서 태양처럼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힘과 연결됐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인도 일부에선 커리의 원료인 노란색 허브 강황을 힘과 권력을 상징으로 여긴다고 한다. 중국에서 선명한 노랑 옷은 황제의 전유물이었다.

파랑은 창공이란 말에서 보듯 하늘을 의미하는 색이었다. 우주인들은 지구를 ‘푸른 별’로 표현했다. 문제는 푸른색 안료의 가격이다. 아프가니스탄산 울트라마린, 인도의 인디고블루, 터키의 터키블루,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블루 등은 유럽 입장에서 초고가의 수입 안료였다. 르네상스와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회화는 푸른색을 많이 쓸수록 값이 비쌌다.

지은이는 여기에 하양·보라·초록을 더한 모두 일곱 가지 색과 관련해 역사와 예술, 그리고 자연과학을 넘나들며 의미와 유래를 낱낱이 파고든다. 책을 읽다 보면 각각의 색이 몸에 스며드는 공감각적인 착각이 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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