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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화 뚫고 온 우크라 태권남매 “포기하지 말자” 희망의 발차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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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다비드 하브릴로프와 예바 하브릴로바 남매가 21일 고양 킨텍스에서 열린 ‘2022 세계태권도 품새선수권대회’에서 품새를 선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다비드 하브릴로프와 예바 하브릴로바 남매가 21일 고양 킨텍스에서 열린 ‘2022 세계태권도 품새선수권대회’에서 품새를 선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조국 우크라이나에 머무는 친구들에게 ‘절대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싸우자’고 말하고 싶어요. 꿈은 반드시 이뤄져요. 우크라이나는 할 수 있어요.”

21일 고양시 킨텍스에서 개막한 2022 고양 세계태권도품새선수권대회에 출전한 14세 우크라이나 소년 다비드 하브릴로프는 국제대회에 출전한 심경을 묻는 질문에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다비드와 여동생 예바 하브릴로바(12)는 매니저 역할을 맡은 아버지 루슬란 하브릴로프(43)와 함께 지난 18일 한국 땅을 밟았다. 러시아가 일으킨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지만, 태권도 종주국에서 열리는 국제대회에서 우크라이나의 기상을 보여주고 싶어 용기를 냈다.

우크라이나 동부 폴타바에 거주하는 세 가족은 당초 전쟁으로 하늘길이 막혀 대회에 참가하지 못할 뻔했다. 하지만 세계태권도연맹(WT)과 대회 조직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우회로를 찾아냈다. 자동차로 30시간을 달려 폴란드로 건너간 뒤 비자를 발급받아 지난 18일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폴타바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루슬란씨는 “태권도 종주국을 방문할 기회를 얻어 영광”이라면서 “지난 2월 크로아티아 대회와 지난달 우크라이나 대회 출전을 목표로 열심히 연습했지만, 전쟁으로 인해 기회를 잃었다. 기적처럼 한국행이 성사돼 감사한 마음뿐”이라고 말했다.

예바와 다비드, 아버지 루슬란 하브릴로프(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연합뉴스]

예바와 다비드, 아버지 루슬란 하브릴로프(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연합뉴스]

우크라이나는 당초 이번 대회에 6명의 선수를 출전시킬 예정이었지만, 전쟁으로 인해 다비드와 예바 남매만 한국 땅을 밟았다. 루슬란씨는 “우리 고향 폴타바는 (우크라이나 제2의 도시이자 주요 교전지) 하리코우와 140㎞가량 떨어져 있는데, 러시아 포격으로 폐허가 됐다”면서 “함께 훈련하던 선수들은 모두 피난을 떠났지만, 우리 가족은 남았다. 전쟁으로 피해를 본 지역민에게 도장을 숙소로 내주고 물과 음식을 제공해왔다”고 말했다. 이어 “코치 또한 징집대상자여서 우크라이나를 떠날 수 없었다”면서 “우리 아이들은 폴타바에서 800㎞가량 떨어진 오데사에 머무는 코치와 화상 대화 서비스를 이용해 원격으로 훈련했다”고 덧붙였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품새선수권 출전을 결정한 건 ‘평화는 승리보다 소중하다(Peace is more precious than triump)’는 세계태권도연맹의 슬로건을 품새 동작으로 구현하고 싶어서다. 다비드는 “우크라이나 국민이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접하면 ‘태권도 선수들이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국제무대에서 노력한다’며 자랑스러워할 것”이라고 말했다. 예바는 “한국에서 열리는 대회에 출전하고 싶어 꾸준히 노력했다”고 했다.

7년 가까이 태권도를 수련한 남매는 2년 전부터 겨루기 대신 품새를 연마해왔다. 대회 첫날 열린 유소년부(12~14세) 페어(2인조) 경기에서 13개 팀 중 7위에 올라 8팀이 겨루는 결선에 진출했다. 에바는 22일 유소년부 여자 개인전, 다비드는 23일 유소년부 남자 개인전에 각각 출전한다.

루슬란씨는 잡아먹으려는 새에 맞서 싸워 끝내 살아남은 개구리 이야기를 다룬 우크라이나 전래 동화를 소개한 뒤 “역경을 극복하고 한국 땅을 밟은 우리 가족처럼, 우크라이나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24일 대회 일정을 모두 마친 뒤 세계태권도연맹 본부, 국기원 등을 방문하고 26일 귀국길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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