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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기르는 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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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문태준 시인

문태준 시인

제주도는 이제 봄빛이 완연하다. 봄의 대지 위로 생명들은 왕성한 활동을 시작했다. 꽃이 피고 새순이 올라오고 풀들은 땅을 푸르게 덮는다. 산과 들에 사람들이 붐빈다. 나도 시장에 가서 상추와 부추 모종을 사서 텃밭에 심었다. 화분도 몇 개 새로이 사서 꽃을 심었다. 과실나무와 꽃나무 묘목도 몇 그루 심었다. 틈이 나는 대로 밭에 가서 풀을 뽑고 땅을 고른다. 조만간 오이와 토마토를 심을 계획도 세웠다. ‘고사리도 꺾을 때 꺾는다’는 말이 있듯이 때를 놓치지 말고 제때에 하려고 애쓰고 있다. 시골에 살면서 참 오랜만에 텃밭을 가꾸고 내가 먹을 것을 내 손으로 기르고 있다. 물론 그래서 손이 바빠지기는 하지만 이런 일은 소소한 행복의 일이다. 이제 나무는 신록을 펼치고 이에 따라 나무의 그늘도 생겨나고 넓어지고 짙어지고 있다. 봄의 절정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풀밭이 있는데 이곳으로 염소들이 왔다. 어미 염소 한 마리와 새끼 염소 두 마리였다. 새끼 염소 머리에는 조그마한 뿔이 돋았다. 젖을 뗄 때가 되었는지 어미는 품속으로 파고드는 새끼 염소들을 밀쳐낸다. 물론 새끼 염소들은 이제 풀을 혼자 뜯어 먹기도 한다. 스스로 찾아 먹고 스스로 굶주림을 피할 만한 때가 된 것이다. 어제 아침에는 이 두 마리의 새끼 염소 목에 목줄이 달렸다. 주인은 이제 곧 말뚝을 박아 새끼 염소들을 매어 둘 것이다. 그러면 염소들은 각각의 풀밭을 갖게 될 것이다. 새끼 염소들이 뛰어노는 모습은 너무나 경쾌하다. 작고 까만 몸을 공중으로 밀어 올리는 그 탄력이 신기하기만 하다.

자연 세계에는 이제 완연한 봄빛
살아있는 생명 돌보며 행복 느껴
생명을 돕는 일은 자신을 돕는 일

나도 어릴 적에 염소를 기른 적이 있었다. 토끼와 강아지와 함께 기른 적이 있었다. 새끼 염소를 사서 먹여 길러 그 염소가 다시 새끼를 낳는 것을 보았다. 풀을 뜯어다 주거나 풀을 먹이러 풀밭으로 데리고 가는 일은 나의 몫이었다. 생명을 먹이고 기르고 보살피고 또 그 생명이 생명을 낳는 일을 돕고 보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아마도 생명을 길러냈던 내 어릴 적 경험이 나의 시 세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풀밭으로 염소 가족이 온 이후로 나의 관심과 일 하나가 더 늘었다. 그 어미 염소의 줄이 자주 나무 그루터기 같은 것에 걸리고 얽혀 옴짝달싹 못 하고 묶여있는 경우가 잦은데, 어미 염소는 풀밭이 떠나갈 정도로 울어대었고 그러면 나는 하던 일을 미루고 어미 염소에게 가서 엉킨 줄을 풀어주고 또 다른 싱싱한 풀밭의 한가운데로 데려놓곤 한다. 어미 염소는 나를 알아보는 눈치다. 내가 다가가면 새끼 염소들도 피하거나 도망가지 않는다. 나는 내친김에 풀밭에 잠시 자리를 잡고 앉아 새로 돋은 풀잎과 풀잎을 뜯는 염소 가족과 풀잎을 눕히고 가는 바람을 바라보면서 잠시 숨을 고르곤 한다.

“사람아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일 중에서/ 더욱 이름 없이 사는 일 중에서/ 아주 조그만 풀잎처럼 땅에 발을 붙이고/ 참으로 오는 바람, 가는 바람에/ 조용히 나부끼고자”라고 쓴 신현정 시인의 시 ‘타인’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내 집 마당에는 강아지 한 마리가 산다. 이름을 오롬이라고 불러주고 있다. 작년 1월에 태어났다고 하니 이제 두 살이다. 작년 여름에 데려와 돌보고 있다. 데려왔을 때는 비쩍 마른 상태였고 병이 있었으나 이제는 살도 제법 붙었고 아주 건강해졌다. 마당에서 강아지를 기르는 일도 어릴 적에 그렇게 해 본 이후로 엄청 오랜만에 하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 오롬이는 털갈이를 했다. 사람으로 치자면 겨울옷을 벗고 여름옷으로 갈아입은 셈이다. 강아지를 기르면서 나의 내면이 훨씬 밝아진 듯도 하다. 먹이고 씻기고 함께 지내면서 정이 깊어졌다.

나의 졸시 ‘오롬이 2’도 지었다. “땅이 해를 받으면/ 오롬이도 땅바닥을 뒹굴며/ 해를 받아요/ 등을 대고 접시처럼 누워/ 토실토실한 배 위에/ 해를 받아요/ 나는 작고 따뜻한 손바닥을/ 오롬이의 배에 대고/ 쓰다듬고 문질러요/ 오롬이는/ 내 손바닥의 햇살도 좋아해요”라는 동시를 통해 오롬이라는 한 생명과 지내는 일에 대해 썼다.

네 계절이 모두 생명들을 돌보겠지만 봄의 절기는 특히나 생명을 낳고 기르는 계절일 테다. 이 계절이 되니 내가 지금 돌보고 있는 생명들에 대해 더 각별하게 생각하게도 된다. 생명을 기르는 일보다 숭고한 일도 없을 것인데 이렇게 생명을 기르다보면 자애의 마음이 내게 생겨나고 커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다른 생명을 기르고 돕는 일은 내 생명을 기르고 돕는 일일 테다.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