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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누구를 위한 ‘검수완박’ 인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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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원석 제주지검장

이원석 제주지검장

꺼꾸리와 장다리. 경찰에서 구속해 검찰로 송치된 2인조 좀도둑이다. 영화에서 나온듯한 캐릭터다. 영장을 보니 훔친 카드를 마트에서 쓰고, 금은방에서 목걸이도 샀다. 전과도 여럿이다. 경찰 수사기록을 꼼꼼히 살펴본다. 피해자 조사가 됐고, 마트 종업원과 금은방 주인은 “인상착의가 맞다”고 진술했다. 신나게 카트를 타는 마트 CCTV도 있다. 범행을 인정하는 ‘반(半)자백’까지 했다.

쉽게 생각하고 첫 질문을 던졌는데 강하게 부인한다. “경찰에서 다 인정했잖아요. 목격자도 맞다고 해요. CCTV도 있어요.” 전과기록을 보니 수법도 비슷하다. 경찰에서는 자백해 놓고 검사를 우습게 보나 싶어 부아가 치민다. 연일 추궁하고 달래봐도 “절대 아니다”라며 잡아뗀다. 마트 종업원과 금은방 주인을 다시 불러 2인조를 편면경 앞에 세웠더니 “확실하다”고 한다.

인간의 경험·기억은 허점투성이
경찰 수사기록도 정확하지 않아

구속 만기 하루 전. 이 정도 증거라면 바로 기소해도 유죄다. 그런데 두 사람의 표정·손짓·몸짓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증거가 딱 떨어지니 더 꺼림칙하다. 안 되겠다 싶어 원점에서 다시 시작한다. CCTV 해상도가 떨어져 체형만 드러나고 얼굴은 안 보인다. 느낌이 좋지 않다. 선입견을 갖고 전과자를 끼워 맞추면 그리 보일 수도 있다. 목격자들도 얼굴까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금목걸이가 회수되지 않았다.

확신이 서지 않는다. 구속 만기를 열흘 연장했다. 다 끝난 일로 알고 있던 경찰관을 불렀다. 암시장에서 금목걸이를 찾아보자고 했다. (검사의 경찰 수사지휘권이 있을 때였고, 지난해부터 폐지됐다) 2차 구속 만기에 쫓길 무렵 사색이 된 경찰관이 뛰어왔다. 팔린 금목걸이를 찾았고 진범을 잡았다는 것이다. 체형이 똑 닮은 또 다른 ‘꺼꾸리와 장다리’를 보고 경악했고, 그들은 자백했다. 또 다른 목격자들에게 새 2인조를 보여줬더니 역시 100% 진범이란다. 구속된 두 사람을 바로 석방했고 형사보상금을 받도록 조치했다.

인간의 경험과 기억이 얼마나 허술하고 믿기 어려운 것인지 절감했다. 수사에 기막힌 우연이 개입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목격자들은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성실한 경찰관이 누명을 씌운 것도 아니었다. 그 후로 나는 인간의 경험과 기억을 쉬이 믿지 않는다. 그래서 경찰이 만들어온 기록만으로 판단하지 않고 직접 진술을 듣고 증거를 살펴봐야 안심이 되고 직성이 풀린다. 심지어 내가 보고 들은 것조차도 의심해보곤 한다.

검찰수사권을 완전 박탈(‘검수완박’)한다고 한다. 정치적 사건의 공정성 지적을 뼈아프게 받아들이지만, 99.9%를 차지하는 애먼 민생사건까지 수사를 못 하게 만든다는 발상에 기가 막힌다. 이제 보통 사람들은 경찰에서 못다 한 말을 검찰에 할 수도 없고, 검찰청에 고소장도 못 내게 된다. 검사가 사건관계인을, 국민을 만나 생생하고 절절한 말을 들을 수도 없다. ‘꺼꾸리와 장다리’의 말 한마디 못 듣고 경찰기록만 놓고 판단해야 한다. 도대체 누구에게 어떤 이익이 있길래 이렇게도 급히 법을 바꾸려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은 “수사기록을 집어던져라. 변호사가 내는 서면은 상대를 속이려는 거다”라고 일갈했다. 인권보장 제도로 도입된 영장실질심사는 수사단계에서 이미 판사가 피의자를 만나 진술을 듣게 한다. 왜 그랬겠는가. 남이 만든 종이쪼가리만으로 판단하지 말고, 직접 만나 들어봐야 억울한 사람 만들지 않고 제대로 처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재판을 청송(聽訟)이라 불러 ‘듣는다’는 뜻을 강조한 이유를 새겨봐야 한다. ‘검수완박’으로 수사도 못 하고 석방 권한도 없이 경찰 기록만으로 결정했다면, ‘꺼꾸리와 장다리’는 교도소 신세를 족히 1년 반은 졌을 것이다. 지금도 그 두 사람에게 여전히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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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석 제주지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