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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역지사지(歷知思志)

공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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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유성운 기자 중앙일보 기자
유성운 문화팀 기자

유성운 문화팀 기자

“뇌물이 사방에서 모여들고 남에게 주는 것도 마땅함을 지나쳤다. 연산(燕山)이 쫓겨나자 궁중에서 나온 이름난 창기들을 많이 차지하여 비(婢)를 삼고 별실을 지어 살게 했으며, 거처와 음식이 참람하기가 한도가 없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르게 여기었다.”

『중종실록』에 기록된 박원종의 졸기 중 일부다. 박원종은 중종반정을 주도한 대표적 공신이다. 전 국왕인 연산군의 사치와 학정에 질려있던 조선 사회는 반정 이후 들어선 새 정권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일부 공신들이 보여준 행태는 이전 정권의 특권을 자신의 것으로 챙긴 것에 지나지 않았다. 선명한 차별화를 통해 새 정권의 정당성을 획득했어야 할 처지에 구태를 재연했으니 반정의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중종은 그의 능력과 공로를 평가해 공신으로 영의정에 오르고 평성부원군에 봉했다.

공신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공신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이러한 국정 운영은 중종 치세 중반에 조광조와 기묘사림(己卯士林)이라는 급진적인 성리학 원리주의자들이 정계에서 급부상하는 토양을 제공했다. 이들은 공신 세력의 특권을 비판하고 선명한 도덕정치를 주창해 여론의 호응을 얻었다. 새 정권에 걸었던 기대감이 조광조 세력으로 옮겨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고려치 않은 기묘사림의 개혁은 조선에 적잖은 혼란을 빚었고 기묘사화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중종은 재위 초반 반정의 정당성과 새 시대의 청사진을 확실하게 보여주지 못한 탓에 꽤 비싼 정치적 비용을 치러야 했다. 왕정에서도 민심이 이렇게 움직이는데, 국민이 주권자인 공화정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