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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신용품 받으러 2시간 줄선다…아시아계 美여성 공포의 거리

중앙일보

입력

소설 파친코를 쓴 이민진 작가가 지난 3월 아시아계 여성 6명이 살해된 애틀란타 총격 사건 추모 집회에서 평소 자신이 지니고 다니는 립스틱 모양의 호신용 페퍼 스프레이를 들어보이고 있다. AP=연합뉴스

소설 파친코를 쓴 이민진 작가가 지난 3월 아시아계 여성 6명이 살해된 애틀란타 총격 사건 추모 집회에서 평소 자신이 지니고 다니는 립스틱 모양의 호신용 페퍼 스프레이를 들어보이고 있다. AP=연합뉴스

최근 미국 맨해튼 멀버리 거리의 한 가게 앞에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들이 긴 줄을 섰다. 일부는 2시간 넘게 기다리기도 했다. 이들이 이토록 손에 넣고 싶어했던 건 호신 용품. 시민단체 '소어 오버 헤이트(Soar Over Hate)'는 이날 이곳에서 아시아계 여성들에게 호신용 페퍼 스프레이 1000병과 휴대용 알람을 나눠줬다.  

이 시민단체의 공동 대표인 켄지 존스는 "우리(아시아계 미국인 여성들)는 스스로를 무장시키고 방어할 준비를 하길 원한다. 우린 단지 두려워할 뿐 아니라, 행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증오 범죄가 잇따르면서 이들 여성 사이에 스스로를 지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고 1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들이 증오 범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호신용 페퍼 스프레이를 받으려고 길게 줄을 서 있다. 소어 오버 헤이트 트위터 캡처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들이 증오 범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호신용 페퍼 스프레이를 받으려고 길게 줄을 서 있다. 소어 오버 헤이트 트위터 캡처

보도에 따르면 많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호신 용품을 갖고 다니는 것은 물론이고, 호신술 수업을 듣거나 자체적으로 순찰 조직을 결성하고 있다. 맨해튼의 펄 리버 마트는 대부분이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인 직원들의 안전을 고려해 영업 시간까지 단축했다. 조앤 광 사장은 "직원들이 밤늦은 시간에 퇴근하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직원들에게 페퍼 스트레이와 휴대용 알람도 나눠줬다"고 말했다. 이어 "그것(아시아계 여성 대상 범죄)은 무작위로 발생한다"고 우려했다.  

미국에선 아시아계 여성을 상대로 한 잔혹한 범죄가 이어져 충격을 안기고 있다. 지난 2월 맨해튼에선 30대 한국계 여성이 집까지 뒤쫓아온 노숙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앞서 1월엔 한 중국계 미국인 여성이 뉴욕 맨해튼의 타임스 스퀘어 지하철역에서 한 흑인 남성에 의해 선로로 밀쳐져 사망하기도 했다. 지난해 3월 애틀란타에선 20대 백인 남성의 총기 난사로 한국계 여성을 포함한 아시아계 여성 6명이 목숨을 잃었다.  

FT에 따르면 코로나19의 기원이 중국으로 지목되면서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아시아계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증오 범죄가 급증했다. 뉴욕 경찰은 지난해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증오 범죄가 예년보다 360% 이상 급증했다고 추정한다. 비영리단체 스탑 AAPI 헤이트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19 대유행 초기인 2020년 3월부터 말까지 발생한 증오 범죄 1만905건 가운데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이 피해자인 사건은 62%를 차지했다.  

지난 1월 미국 타임스 스퀘어 지하철역에서 희생된 중국계 미국인 여성을 추모하는 집회. 에릭 애덤스 뉴욕시장이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1월 미국 타임스 스퀘어 지하철역에서 희생된 중국계 미국인 여성을 추모하는 집회. 에릭 애덤스 뉴욕시장이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아시아계 여성들의 불안과 공포는 확산하고 있다. 아시아·태평양 미국 여성 포럼의 설문 조사 결과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 5명 중 1명은 공공장소를 피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응답자의 6%는 "직장을 가는 게 두렵다"고 답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지난해 5월 코로나19 증오 범죄 방지법에 서명하고, 뉴욕 경찰이 아시아계 증오 범죄 전담반을 만드는 등 대응책을 내놓고 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런 가운데 증오 범죄로부터 아시아계 여성들을 보호하려는 민간 차원의 노력도 확산하고 있다. 최근 한 자원봉사 단체는 맨해튼 지하철역에서 신청자와 집까지 동행해주는 활동을 하고 있다. 

중국계 미국인 자산가 오스카 탕은 자신의 아내, 친구들과 함께 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 호루라기 50만개를 배포하는 프로젝트를 펼치고 있다. 탕은 "이것(호루라기)은 매우 간단하고 기본적인 안전 장치이지만, (증오 범죄에 대한) 목소리를 높인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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