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최장수 한반도본부장 이도훈 "北, '완전한 비핵화' 인정한 적 없다"

중앙일보

입력

문재인 정부의 남북 및 북ㆍ미 협상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했던 이도훈 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남·북·미 간 정상회담이 열린)2018년~2019년 미국과의 협상 과정에서 북한 측은 한ㆍ미가 지향하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목표를 인정한 바 없었다"고 말했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깊숙이 관여했던 전 당국자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비핵화 의지 자체에 직접 의문을 제기한 건 처음이다.

13일 '국제 환경의 대변동과 차기 정부의 외교ㆍ안보ㆍ대북정책'을 주제로 한 세종연구소 주최 포럼에 참석한 이도훈 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세종연구소 유튜브 캡처.

13일 '국제 환경의 대변동과 차기 정부의 외교ㆍ안보ㆍ대북정책'을 주제로 한 세종연구소 주최 포럼에 참석한 이도훈 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세종연구소 유튜브 캡처.

"文 보증했던 '비핵화 의지'는…"

이 전 본부장은 13일 '국제 환경의 대변동과 차기 정부의 외교ㆍ안보ㆍ대북정책'을 주제로 한 세종연구소 주최 포럼에서 "북한의 전략적 목표는 사실상 핵 보유국 지위를 인정받고, 미국과 핵 보유를 전제로 핵 군축 협상을 하는 것"이라며 이처럼 말했다. 그러면서 "북한이 이런 전략적 목표를 갖고 있다면 2018년 현 정부가 보증해 준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는 무엇이었을까"라고 반문했다.

이어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 표명은 북한이 항상 주장해온 '조선반도 비핵화'를 되풀이한 데 지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조선반도 비핵화는 남북을 포괄하는 한반도 전체의 비핵화와 미국의 핵 위협 제거가 포함된 개념"이라면서다.

이와 관련, 실제 북한은 2016년 7월 '조선반도 전역 비핵화를 위한 5개의 요구 조건'을 담은 정부 대변인 성명을 내고 남한 내 미 핵무기 공개, 미 전략자산 한반도 전개 금지, 주한미군 철수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시종일관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갖고 있다고 신뢰했다. 문 정부 초반이던 2018년 3월 정의용 당시 국가안보실장(현 외교부 장관)을 비롯한 대북특사단이 방북 결과 브리핑을 통해 "북측은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했으며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북한의 체제 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고 밝힌 게 시작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이후에도 핵ㆍ미사일 개발을 계속하면서 당시 특사단이 확인했다는 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의 진의에 대한 논란이 꾸준히 제기됐다. 그럼에도 정 장관은 지난해 12월 내신 기자회견에서 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 관련 질문에 "상대방의 의지를 믿어주는 방향으로, 그런 자세를 가지고 협상을 해야 된다"고 답했다.

"北에 선제 보상 무의미"

이 전 본부장은 한·미가 대북 협상력을 선제적으로 약화시킨 데 대해서도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2018년 북한이 접근해오기 시작하자 한ㆍ미는 스스로, 그리고 일방적으로 대북 레버리지를 약화시켰다"고 말했다. "북한과의 협상 과정에서 밀고 당김도 없고, 비핵화 조치를 받아내지도 않은 상태에서 선제적이고 일방적으로 레버리지 약화만 이뤄졌다"는 것이다. 한·미 연합훈련 유예 및 축소 등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이로 인해 시간이 갈수록 북한의 툴 박스(Tool Boxㆍ도구 상자)는 가득 차고 한ㆍ미의 툴 박스는 비어가는 결과가 초래됐다"며 "협상이 시작되기도 전에 분위기 조성의 이름으로 일방적으로 (보상을)넘겨주는 방식은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협상의 재개를 위해, 화해와 평화 분위기 조성을 위해, 북한이 비핵화를 수월히 할 수 있도록 등의 이유로 선제적으로, 일방적으로 보상부터 해 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이제 우리는 잘 안다"고도 말했다.

13일 '국제 환경의 대변동과 차기 정부의 외교ㆍ안보ㆍ대북정책'을 주제로 한 세종연구소 주최 포럼에 참석한 이도훈 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세종연구소 유튜브 캡처.

13일 '국제 환경의 대변동과 차기 정부의 외교ㆍ안보ㆍ대북정책'을 주제로 한 세종연구소 주최 포럼에 참석한 이도훈 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세종연구소 유튜브 캡처.

역대 최장수 본부장의 쓴소리

이 전 본부장의 이날 발언은 그가 2017년 9월부터 2020년 12월까지 3년 3개월동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지낸 역대 최장수 북핵 수석 대표였다는 점에서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대한 뼈아픈 자성이 담겼다는 평가다.

그는 2018년 4ㆍ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6ㆍ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 직접 관여했을 뿐 아니라, 결렬로 끝났던 2019년 2월 하노이 북ㆍ미 정상회담 및 같은 해 6월 남북미 판문점 회담, 10월 스톡홀름 북ㆍ미 실무회담 등을 둘러싼 전후 사정에도 가장 밝은 인사다. 카운터파트였던 스티븐 비건 전 미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정책특별대표와 소통에도 탁월했다는 평가다.

그는 한반도본부장을 마친 뒤 재외공관장 등 별다른 보직을 받지 못하고 퇴임했다. 이후 연구 활동에 매진하다 대선 기간에는 윤석열 당선인 캠프에 몸 담았다.

2020년 12월 이도훈 당시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오른쪽)과 스티븐 비건 당시 미국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정책특별대표가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회담에 앞서 인사를 나누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2020년 12월 이도훈 당시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오른쪽)과 스티븐 비건 당시 미국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정책특별대표가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회담에 앞서 인사를 나누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北, 군축 협상 압박할 것"

향후 북한의 행보와 관련해 이 전 본부장은 "핵 보유국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협상에 나오기까지 시간을 끌고, 협상이 시작돼도 결렬과 복귀를 반복할 것"으로 전망했다. 또 "한ㆍ미로 하여금 비핵화는 현실적인 목표가 아니므로 차선으로서 핵 군축을 받아들이도록 압박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북 제재에 대해선 "현실적으로 북한을 움직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자 가장 강력한 지렛대"라고 평가했다. 또 "북한에 현금이 유입돼 경제적으로 숨통이 트이는 순간 비핵화는 물 건너가기 때문에, 제재 해제ㆍ완화는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대북 제재에 대한 중국의 비협조, 중ㆍ러 결탁으로 인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마비 등을 현 제재 체제의 걸림돌로 꼽았다. 또 불법 해상 환적, 노동자 송출, 사이버 절도 등 제재를 회피하는 북한의 내성도 강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