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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메뉴 사라져 "도시락 연명"...코로나에 우는 '캠퍼스 비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국민대 학생식당에서 나왔던 채식 메뉴. 지금은 채식 식단 제공이 중단된 상태다. 사진 국민대총학생회

국민대 학생식당에서 나왔던 채식 메뉴. 지금은 채식 식단 제공이 중단된 상태다. 사진 국민대총학생회

"캠퍼스 안은 물론이고 근처에도 채식 식당이 없다 보니 요새는 도시락을 직접 준비해서 학교에서 밥 먹어요."

성신여대 학생 손지우씨는 고기를 먹지 않는 '비건'(채식주의자)이다. 그는 2년 전부터 학교에서 사라진 채식 메뉴로 오랫동안 식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학생식당 운영이 감축되면서 채식 식단도 제공되지 않기 때문이다.

올봄 거리두기 완화 속에 대면 수업이 확대된 대학가엔 오랜만에 학생들의 발걸음이 잦아지고 있다. 하지만 코로나19 유행으로 중단된 채식 식단의 재개는 기약이 없다. 이 때문에 비건 학생들에게선 코로나19로 채식할 권리도 보장받지 못한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학생 인권이나 자유와 연관된다는 지적이지만, 일각에선 채식 식단까지 학교에서 챙겨줘야 하냐는 반론도 나온다.

완연한 봄 날씨가 이어진 7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에서 학생들이 모여있는 모습. 뉴스1

완연한 봄 날씨가 이어진 7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에서 학생들이 모여있는 모습. 뉴스1

코로나 여파에 대학 곳곳 채식 식단 축소·중단

코로나19 유행 이후 학내 유동 인구가 감소하자 캠퍼스의 학생식당 운영은 자연스레 축소됐다. 동국대·국민대·성신여대 등 여러 대학은 그간 운영해오던 채식 메뉴 제공을 중단했다. 서울대도 이용 학생 감소를 이유로 채식 뷔페 운영을 중단했다. 올 들어 대면 수업 확대와 함께 운영을 재개했지만, 점심 식사만 가능하다. 현재 채식 학생식당이 있거나 채식 메뉴 제공하는 대학은 서울대·연세대·중앙대·삼육대·경북대·서울시립대·한국예술종합학교 등이다.

애초 계획한 채식 식단 도입을 백지화한 학교도 있다. 연세대는 현재 야채라면만 채식 메뉴로 제공한다. 2020년 새로운 채식 메뉴를 도입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로 학생식당 운영이 축소되면서 이러한 계획이 무산됐다. 평소 채식을 한다는 연세대 학생 정모씨(25)는 "야채라면 제공만으로는 학내 채식 선택권이 보장된다고 볼 수 없다. 코로나 확산이란 어려운 상황이지만, 학생들의 식사 다양성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했다"고 말했다.

동국대 학생식당 식단표에서 공란으로 빠져 있는 채식 식단. 인터넷 캡처

동국대 학생식당 식단표에서 공란으로 빠져 있는 채식 식단. 인터넷 캡처

학교 생협 "재정난 심화" vs 학생 "소통 부족"

대학 측은 학생 수요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채식 메뉴 중단이나 축소는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비용과 경제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채식 뷔페 운영을 일시 중단했던 서울대 생활협동조합(생협) 관계자는 "학생 수 자체가 줄어든 데다 재정난이 심해지면서 채식 뷔페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설명했다. 연세대 생협 관계자도 "교내 식당은 배달 음식, 외부 업체와 경쟁을 해야 한다. 여기에다 코로나19로 학생식당이 어려운 상황인데, 재정적인 면을 고려하면 모든 학생의 요구를 수용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채식 메뉴에 대한 고민이나 사전 소통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배유경 서울대 다양성위원회 책임전문위원은 "식당의 손익 계산이 이뤄지는 건 당연하지만, 구성원의 다양성이 필요한 이슈에 대응하는 것도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같은 학교 채식 동아리 '스누비건'에서 활동하는 유라씨는 "채식 뷔페가 중단된 걸 학교 측 통보로 뒤늦게 알았다. 사전에 학생 의견을 수렴하려는 노력은 전혀 없었다"라고 밝혔다.

대면 수업이 확대된 만큼 채식 메뉴도 다시 확충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서울대생 최지원씨는 "학생 식당은 두세 가지 메뉴를 판매하는 곳이 많다. 이 중 하나라도 채식인과 비채식인이 모두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제공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채식 메뉴 재확충해야" 인식 개선 목소리도

지난달 28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저항의 상징인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참석자가 'MEAT'(고기)라고 적힌 종이를 가위로 자르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8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저항의 상징인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참석자가 'MEAT'(고기)라고 적힌 종이를 가위로 자르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학생식당 식단 조정을 넘어 채식에 대한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기후변화와 환경오염, 늘어나는 채식 인구나 사회적 다양성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내 채식 인구를 집계한 공식 통계는 없지만, 한국채식연합에 따르면 올해 기준 약 20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20~30대의 절반 이상이 채식에 관심이 있다는 보고서(대홍기획)가 지난해 나왔고, 비건 시장 규모가 매년 10%가량 성장할 거란 분석도 있다.

유라씨는 "최근 기후 위기, 지속 가능성 이슈가 커지는 상황에서 고기 없는 에코 식단은 학생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 식당 재정이 문제라면 채식 메뉴를 중단하기보다 새로운 수요를 끌어낼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원복 한국채식연합 대표는 "20대들은 채식 문화를 이끌어가는 세대다. 대학 내 채식 인프라는 채식에 친화적인 사회로의 연쇄 효과를 끌어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서울대생들이 교내 생협 홈페이지에 채식 메뉴를 제공해달라고 올린 건의 사항들. 인터넷 캡처

서울대생들이 교내 생협 홈페이지에 채식 메뉴를 제공해달라고 올린 건의 사항들. 인터넷 캡처

"가격 인상 초래해 다른 학생 피해" 반론도

반면에 굳이 채식 권리까지 보장해줘야 하냐는 회의적 반응도 있다. 채식은 개인의 선택인 만큼 코로나19 상황과 학생식당의 추가 인상 우려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학생식당 말고도 다른 선택지가 충분히 있는데 과도한 요구라는 것이다.

서울대생 A씨는 "최근 들어 학교 생협 적자 때문에 학생식당 메뉴 가격이 엄청 올랐다. 이런 식당들이 채식 메뉴까지 챙기다간 가격이 더 오를 수 있을 거 같다"면서 "물론 비건 학생들도 학내에서 밥을 먹어야 하지만, 소수 학생 때문에 다른 학생들이 더 비싸진 식당 가격을 감당해야 하는 건 옳지 않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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