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실제 러시아 '방사능 호수', 우크라 침공… 2030 작가가 SF로 담은 세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019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김초엽 작가를 세상에 알린 출판사 허블이 SF 시리즈를 시작했다. 작가들이 앞으로 써낼 작품의 '티저'격 단편 5편을 모은 SF시리즈 『초월하는 세계의 사랑』을 펴냈다. 왼쪽부터 조예은, 우다영, 박서련, 문보영 작가. [연합뉴스]

2019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김초엽 작가를 세상에 알린 출판사 허블이 SF 시리즈를 시작했다. 작가들이 앞으로 써낼 작품의 '티저'격 단편 5편을 모은 SF시리즈 『초월하는 세계의 사랑』을 펴냈다. 왼쪽부터 조예은, 우다영, 박서련, 문보영 작가. [연합뉴스]

고준위 방사능 폐기물을 버린 탓에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방사선을 내뿜는 곳'이 된 러시아의 카라차이 호수, 인류의 70%를 감염시킨 바이러스, 사람들의 개인 정보를 모은 빅데이터를 이용해 스스로 사고하는 AI….

실존하는 현상이나 대상에 간단한 '차이'만 설정해 넣었더니, 굉장히 낯설고 색다른 이야기가 됐다. (박서련). 2030 작가 다섯 명이 최근 펴낸 『초월하는 세계의 사랑』(허블)에 담긴 SF 단편들의 세계는 지금 여기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미래를 보는 사람들이 있는 세상, 로봇에게 공동의 기억을 이식하는 사회, 운석에 묻어온 외계 바이러스 감염으로 생겨난 괴물이 특수요원으로 활약하는 세계다. 5일 출간 간담회에 나선 조예은 작가는 "실제로 러시아에 있는 오염된 호수 '카라차이 호'에서 영감을 얻어, 상상력을 조금 넣었다"며 "과학적 지식이 깊은 건 아니어서 설득력 있는 세계관을 만드는 데 특히 공을 들였다"고 말했다.

'SF'조건 외에 "마음대로 써달라"… 모으고 보니 대부분 2030 여성

『초월하는 세계의 사랑』에는 우다영의 '긴 예지', 조예은의 '돌아오는 호수에서', 문보영의 '슬프지 않은 기억집', 심너울의 '커뮤니케이션의 이해', 박서련의 '이다음에 지구에서 태어나면', 이렇게 5편의 중·단편이 담겼다. 이를테면 이들이 앞으로 집필하는 단행본 SF의 '티저'를 모은 책이다. 박서련 작가가 "'단편은 반드시 장편으로 이어져야만 한다' '선행 규칙을 어기지 않는 한도 안에서 작품은 재밌어야 한다', 이 두 가지 규칙을 어기지 않으면 이기는 게임으로 생각하고 썼다"고 말한 터다.

다섯 명은 '무서운 아이들' 격이다. 박서련은 독자들 사이에 최고의 젊은 작가상으로 자리 잡은 2021년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을 받았다. 문보영은 2017 시문학상인 김수영문학상을 받은 시인 출신이다. 무엇보다 나이가 한창때다. 1989~1994년생이다. 출판사 김학제 편집팀장이 평소 눈여겨봤던 SF 작가, 'SF를 쓰는 게 꿈'(문보영)이라고 했던 작가 등 5명을 섭외해 소설집이 나오게 됐다. "나이나 성별을 의도한 건 아닌데, SF에 관심 있고 최근 가장 적극적인 작가를 모으다 보니 모두 2030, 심너울 작가를 제외하고 4명이 여성 작가다.지금도 추가로 작가를 섭외 중인데 SF를 쓰기만 한다면 성별·나이는 상관없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현재 집필 대기 중인 14명도 김희선, 심너울을 제외하면 모두 2030 여성 작가다.

김초엽 알린 그 곳… "목표는 온고잉 시리즈"

김초엽의 2019년 SF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의 2019년 SF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허블은 김초엽의 베스트셀러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2019년) 출간으로 그동안 소수의 전유물이었던 SF를 대중화하는 데 일조했다. 이번 SF 시리즈를 기획하며 'SF'라는 조건 이외에 공통 테마도, 일정한 방향도 없이 자유롭게 써달라고만 했다고 한다. 소설집 제목조차 다섯 작품을 아우르는 '초월' '세계'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조합해 지었다. 문보영 작가는 "그랬는데도 다섯 작품에 공통적으로 '사랑'이 들어간 게 신기했다"고 말했다. 박서련 작가는 "일반 문학 작품이 개인 다음에 세계가 등장한다면, SF는 개인과 세계가 동시에 등장한다고 할 만큼 '세계'가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김학제 편집자는 "SF라는 경계 안에서 작가 하나하나가 세계관을 고스란히 펼치는 판을 만들고 싶다"며 "5명이 모일 때마다 선집을 내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1번타자' 우다영, 우크라 침공 본 뒤 일주일 만에 쏟아낸 이야기

소설집 '1번 타자'는 우다영이다. 소설집 맨 처음에 가장 분량 긴 '긴 예지'를 수록했다. '미래를 볼 수 있는 AI'를 만드는 스토리 안에 미래와 현재를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방송국 폭격으로 사망한 사람 등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습을 연상시키는 전쟁 장면이 나온다. 우다영은 "오래 품었던 이야기라 전체적으로 거의 완성됐는데, '어떤 인물이 어떤 상황에 놓였을 때 소설 속에 나오는 행동을 할 지' 판단이 안 돼서 앞부분을 여러 번 고쳐쓰기를 반복하던 중에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김 편집팀장은 "SF이면서도 현실과의 경계가 흐릿해 인류 사회에 관한 묵직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다. 기계와 인류의 경계가 흐릿한 최신 상황도 담았다"고 설명했다.

SF '전혀 엉뚱하다' 편견, "다른 근육을 사용해 쓴 소설일 뿐"

우다영은 "건조하고 논리적인 문장들을 집요하게 따라가다 보면 어떤 충격이나 이해, 정서에 도달하게 되는 SF의 화법에 반해 쓰게 됐다. SF 하면 완전히 엉뚱하고 새로운 걸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평소 생각들과는 다른 근육을 사용해서 소설을 쓴 것뿐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작가들은 SF가 2019년 김초엽의 등장 이후 젊은 세대에겐 재밌고 색다른 소재'로 인기가 높지만, 기성 문학계에선 아직도 거리감과 편견이 있는 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막상 써보니 SF라는 필터를 통해 해보고 싶은 걸 과감하게 해볼 수 있는 게 SF의 매력이라는 점을 알게 됐다고 한다. SF가 벽이 아니라 하나의 설정, 도구 정도라는 의미다.

박서련은 "2015년 등단 이후 '좀비 아포칼립스'를 다루겠다고 하자 주변에서 '다음 원고 청탁이 들어오겠냐'는 우려가 많았다. SF에 '라벨링'을 하는 문단 분위기가 여전하지만 내게 SF는 '게임의 규칙이 하나 더 생긴 정도'일 뿐, 다른 작업과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우다영도 "'SF'에 대한 정의를 질문받곤 하는데 사실 '문학은 무엇인가? 소설은?', 이런 질문은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이라며 "이른바 순문학과 SF가 '서로 얼마나 재밌고 멋진지' 독자를 상대로 경쟁하는 거라는 생각을 몇 해 전부터 하게 됐다. 이미 우리 SF는 그런 단계가 된 것 같다"고 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