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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진이형’도 못 피했다, 재계 덮친 ‘무보수’ 압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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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지난달 30일 경기도 성남에 있는 엔씨소프트 사옥에서 열린 정기주주총회장. 한 소액주주가 김택진 대표이사를 향해 “잠깐이라도 무보수나 최저임금을 생각한 적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김 대표는 “잠깐이 아니라 많이 생각해봤다”며 “미국처럼 무보수이되 다양한 경영 보상 시스템으로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면 수용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답했다.

김 대표는 2020년 연봉과 성과급 등으로 184억원을 받았다. 지난해엔 106억원을 받아 40% 이상 줄었지만 소액주주가 주가 하락 등의 책임을 물어 대폭 삭감 의지를 물은 것이다.

재계 덮친 무보수·최저임금 논란. 그래픽= 전유진 yuki@joongang.co.kr

재계 덮친 무보수·최저임금 논란. 그래픽= 전유진 yuki@joongang.co.kr

셀트리온 주총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벌어졌다. “기우성 대표와 서진석 이사는 주가가 35만원에 도달할 때까지 최저임금만 받고 근무하다 이후에 미지급분을 소급해서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 대표는 주주의 거듭된 촉구에 “주주분들이 힘들다고 하니 제안한 내용에 동의하겠다”고 답했다.

최고경영자(CEO)에 대한 무보수·최저임금 지급 논란이 재계의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다. 주가 하락이나 도덕적 해이 논란 등에 대해 분명하게 책임을 지고, 성과가 나와야 보상을 받겠다는 취지에서다.

이런 논란에 신호탄을 쏜 이는 남궁훈 카카오 대표다. 그는 지난 2월 “카카오 주가가 15만원이 될 때까지 연봉과 인센티브를 보류하고 최저임금만 받겠다”고 했다. 이 경우 남궁 대표가 받는 연봉은 2300만원(최저임금 환산) 수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남궁 대표는 지난해 카카오게임즈에서 55억7400만원(퇴직금 포함), 카카오에서 61억5800만원(스톡옵션 포함)을 받았다.

앞서 재계 총수들 사이에선 ‘무보수 경영’으로 위기를 돌파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관행이 전문경영인으로 확산하는 추세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돼 구속수감된 2017년 2월 이후 지난해까지 보수를 받지 않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해 SK하이닉스 직원이 성과급 산정 기준을 놓고 불만을 제기하자 SK하이닉스에서 받는 연봉을 반납하겠다고 했다.

이석훈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일부 CEO 사이에서 최저임금 선언이 나오는 것은 소액주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변화된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다만 보상 체계가 주가에만 연동돼 있다는 점에선 비판 목소리도 나온다. 조명현 고려대 경영대 교수는 “주가에만 연동된 보상 체계는 단기적 성과와 투자에 매몰되게 해 기업의 체력을 망가뜨릴 수 있다”며 “주가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대해 평가 연동형 보상 체계를 설계하고, 이를 지키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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