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취재 파일] 자원 시장의 검투사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82호 31면

황건강 경제부문 기자

황건강 경제부문 기자

가격을 종잡을 수 없는 원자재 시장의 ‘악동’ 니켈이 한국 경제를 흔들어 놨다. 지난 3월 초 니켈 가격이 24시간 만에 250% 급등한 것이다. 이에 3월 7일 런던금속거래소(LME)에선 니켈 선물 거래를 중단시켰다. 지구 반대편 한국에 충격이 전달되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8일 오전 한국거래소는 ‘대신 인버스 2X 니켈선물 ETN(상장지수증권)’의 거래를 정지시켰고 21일엔 상장 폐지를 선고했다.

니켈 함량이 높은 배터리를 주력으로 삼은 국내 배터리 기업들도 충격을 피하지 못했다. 니켈 가격 고공행진에 테슬라와 리비안 등 글로벌 전기차 업체들은 중국 기업들의 주력 품목인 리튬인산철(LFP)배터리 채용으로 공급망 전략을 수정했다. 이렇게 한국 투자자와 기업들은 시름에 빠졌으나, 정작 사고의 원흉인 중국 칭산그룹은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세계 최대 니켈 생산 업체가 휘청거리다 대형 위기로 번질까 걱정한 런던금속거래소와 글로벌 투자은행들은 거래를 취소하도록 개입했다.

호주에 위치한 한 니켈광산. [연합뉴스]

호주에 위치한 한 니켈광산. [연합뉴스]

원인 제공자는 구제받고, 주변인들만 피해를 보는 ‘대마불사(大馬不死)’ 사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탄의 대상이다. 이번 사태를 두고도 전 세계적으로 비난이 쏟아졌다. 제임스 맥킨토시 월스트리트저널 수석칼럼니스트는 최근 칼럼에서 “정부와 규제 당국이 모든 위기 상황에서 구제 조치의 기준을 낮추고 자주 개입하는 것은 자유 시장에 대한 위협”이라 경고했다.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원자재 확보에 비상이 걸리자 이런 부당한 개입이 빈번해지고 있다는 데 우려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비난은 자원 확보 경쟁에서 효과를 발휘한 적이 없다. 오히려 힘의 논리가 앞선 게 역사의 기록이다. 불과 한 세기 전만 하더라도 석유와 철광석, 고무 등 원자재 확보를 두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1983년 뉴욕상품거래소와 1988년 런던국제석유거래소(현 ICE)가 원유 선물 거래를 시작하면서 파생상품 시장 중심의 자원 확보 시대가 열리자 충돌의 양상이 달라졌을 뿐이다. 총과 칼 대신 자본력으로 치고받는 전장(戰場)이 펼쳐진 셈이다.

전쟁터에서 적에게 공정함을 요구해봐야 얻을 게 없다. 원자재 시장에서 덩치 큰 기업에 대한 특별대우를 비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군사력 대신 자본력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미국만 하더라도 결정적 순간엔 대형 자본 구하기를 마다치 않곤 했다. 전 세계 자본시장이 휘청인 2008년 금융위기 때도 미국 정부는 국내외 비난 여론을 무릅쓰고 구제금융을 단행했다.

당시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회장이 행크 폴슨 미 재무장관에게 전달한 메시지는 미국 지도층의 시각을 드러낸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대통령의 명연설 ‘경기장의 검투사(The man in the arena)’를 인용한 것이다. “뭐가 문제였는지 지적하는 비평가는 중요치 않다. 먼지와 땀과 피로 망가진 얼굴을 하고 경기장에서 실제로 싸우는 사람이 중요하다. 그는 언젠가 승리를 쟁취할 것이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승패를 모르는 냉소적이고 소심한 영혼으로 그를 대신할 수 없다.”

강대국의 속성을 간파한 전문가들은 이 때문에 자원 확보에 나설 국내 기업의 체급을 키워야 한다고 조언한다. 국내에도 원자재 상품거래소를 만들고 시장을 키워 국내 기업들의 해외 자원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하란 얘기다. 거대 기업의 탄생이 가져올 부작용은 감시해야겠지만 시장 논리를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이다. 21세기 들어 자원 개발 강국으로 자리매김한 중국도 이런 경로를 걷고 있다. 우리는 냉혹한 시장에서 땀과 피를 뒤집어쓸 검투사가 있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