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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아도 비관적, 안전해도 불안…한국인만 이러는 이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022년 ‘행복 지수’가 얼마 전 업데이트됐습니다. 유엔 산하 자문기구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가 지난달 18일 '2022 세계 행복보고서'(2022 World Happiness Report)를 공개했습니다. 여기에 세계 각국의 행복 지수가 수록돼 있습니다.

[정글]

우리나라는 146개국 중 59위였습니다. 핀란드가 1위였고 북유럽 국가가 상위권을 차지했습니다.

2022 행복지수 순위. 그래픽=권세경 인턴

2022 행복지수 순위. 그래픽=권세경 인턴

행복 지수는 “지금 얼마나 행복하냐”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응답을 1부터 10까지 점수로 매기게 한 뒤 평균한 값입니다. 각 나라 국민들이 얼마나 행복하다고 느끼는지 ‘주관적 대답’을 측정한 거죠. 여기서 중요한 건, 이게 주관적이라는 겁니다.

UN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는 행복 지수에 기여한 요소가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6가지 지표를 도입했습니다. 6가지 지표는 1인당 GDP, 사회적 지원, 건강 수명, 삶에서의 선택의 자유, 관용, 부패인식 등입니다. 6가지 지표를 합치면 행복 지수가 나오게 설정해놓았습니다.

올해는 특이한 지수를 하나 더 넣었습니다. ‘디스토피아’ 지수입니다. 6가지 지표가 모두 세계 최악인 가상의 나라를 가정한 뒤 이 나라에 만약 산다면 얼마나 행복감을 느낄지를 예측한 값이죠. 이 지수는 국민의 선천적 낙천성을 암시합니다.

디스토피아 지수 1위는 라이베리아, 2위는 베네수엘라였습니다. 행복 지수는 각각 97위, 108위에 오른 나라입니다. 라이베리아는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이고, 베네수엘라는 국가 경제가 붕괴 직전의 나라입니다. 따라서 이들 나라 국민들은 매우 낙천적 심성을 가졌다는 뜻이 되겠죠. 한국은 101위였습니다. 행복 지수보다 순위가 더 낮습니다. 비관적인 심성에 가깝죠. 행복 지수 1위인 핀란드는 디스토피아 지수도 13위로 상위권이었습니다.

잘 살아도 불행하고, 안전해도 불안한 한국인

핀란드와 한국의 차이는 또다른 비교에서도 두드러집니다. 2016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유럽 국가와 한국의 ‘위해 경험률’과 ‘범죄 불안율’을 각각 비교했습니다. 위해경험률은 최근 5년 동안 강도나 신체적 위해를 실제로 경험한 비율입니다. 범죄불안감은 어두울 때 집 주변을 혼자 걸으면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의 비율입니다.

핀란드의 위해 경험률은 26.7%로 조사 대상 국가 중 가장 높은 반면 불안율은 6.8%로 세번째로 낮았습니다. 한국의 위해 경험률은 1.5%로 다른 모든 유럽 국가보다 낮았습니다. 역시 치안이 좋은 나라죠. 하지만 불안율은 23.1%로 최상위권이었습니다.

세계 각국의 위해경험률과 불안율. 그래픽=권세경 인턴

세계 각국의 위해경험률과 불안율. 그래픽=권세경 인턴

이 조사를 상세히 들여다보면 한국의 독특성은 더 두드러집니다. 대체로 다른 유럽 나라는 여성이 남성보다 불안율이 3~4배 높았고, 65세 이상 노령대 불안율이 더 높았습니다. 반면 한국은 남성의 불안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었고, 젊은 연령대가 노령대보다 불안율이 더 높았습니다.

이 논문을 쓴 우선희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전문연구원은 “고령으로 인한 신체적 대처 불능에 따른 불안보다는, 위험 상황에 처할 가능성 자체가 불안을 일으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자극적인 뉴스를 접하는 경우가 많은 저연령층이 TV나 신문으로 뉴스를 접하는 노인층에 비해 불안을 느낄 가능성이 높을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가능성만으로 불안감을 느끼는 ‘예민함’과 국내 미디어의 ‘자극적 경향’이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불안을 퍼뜨리는 미디어

과연 그것만 있을까요. 답을 찾기 위해 여러 논문을 들여다보던 중 범죄와 불안감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풀어낸 논문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2018년 네이처지에 발표된 ‘범죄 공포: 피해자 분포 차이에 따른 영향’입니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에서 수학 박사학위를 받은 멕시코 출신 범죄전문가 라파엘 프리에토 쿠리엘은 범죄의 집중도와 집단 간 상호작용의 차이가 불안감에 미치는 영향을 수학적으로 분석했습니다.

이 논문에 따르면 범죄가 어느 한 집단에 집중돼 있으면 전체적인 불안율은 낮아집니다. 공포와 불안은 전염성이 높은 감정입니다. 범죄 발생이 어느 한 곳에 집중돼 있다면, 그 집단에 불안감이 갇혀 있어 다른 집단에 전염될 일이 적어지죠. 하지만 집단 간 상호작용이 활발하면 범죄가 특정 집단에 집중돼 있다 하더라도 불안이 다른 집단에 전파되기 쉬워집니다. 따라서 전체적인 불안감이 올라갑니다.

미디어와 SNS에 연일 올라오는 범죄 이야기는 보는 이의 불안감을 자극한다. 이는 범죄 건수에 관계없이 전체적인 불안감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사진은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주범 조주빈. 연합뉴스

미디어와 SNS에 연일 올라오는 범죄 이야기는 보는 이의 불안감을 자극한다. 이는 범죄 건수에 관계없이 전체적인 불안감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사진은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주범 조주빈. 연합뉴스

한국인의 불안감은 범죄가 특정 집단에 집중됐지만 상호작용은 활발한 데서 온 게 아닐까요. 프리에토 쿠리엘 박사는 “불안감은 개인에 따라, 문화에 따라 다 달리 해석되기에 이 모델을 100% 적용할 수는 없다”며 “하지만 불안감이 크게 퍼지는 특정 조건이 충족된다면 전체적인 불안감이 올라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여기서 미디어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불안감엔 미디어와 SNS의 영향력이 크다. 폭력을 다루는 미디어에 많이 노출된 사람들은 불안감이 더 크다. 한국인의 미디어 소비에 이런 특성이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쿠리엘 박사의 모델에 따르면, 한국은 집단 간 상호작용이 많고, 미디어와 SNS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범죄에 대한 불안감이 다른 나라에 비해 크다고 해석할 수 있겠죠.

그렇다면 청년층이 범죄 피해 불안을 많이 느끼는 한국의 독특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2019년 논문 ‘서울 시민의 범죄 두려움에 관한 연구’(박종훈 박사)에서도 젊은 층이 노인보다 범죄 두려움이 더 큰 것으로 다시 확인됩니다. 이 논문은 그 원인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범죄가 젊은 연령대인 청소년 또는 20대, 여성을 대상으로 발생하는 빈도가 늘어났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과 같은 10대 학원폭력, 강력범죄와 함께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던 조두순 사건, 양주 여고생 살인사건, 오원춘 사건, 김해 여고생 살인사건 등 비록 서울시에서 발생한 범죄는 아니지만 간접피해로 느끼는 범죄 두려움이 해당 변인의 분석 결과에 반영된 것으로 파악된다.”

예민하지만 초조한 한국인

한국인 특유의 ‘예민함’도 범죄불안감과 연관돼 있는지도 모릅니다. 한국인의 우울증과 예민함에 대해 연구해 온 전홍진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중앙심리부검센터장)는 “10년 전 미국에서 연수할 때 한국과 미국 우울증 환자를 비교 연구했는데 한국인은 서양뿐 아니라 다른 아시아 국가에 비해서도 멜랑콜리아형 우울증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멜랑콜리아형 우울증 환자는 일반 우울증 환자에 비해 슬픈 감정보다 신체 감각에 집중합니다. 가슴이 꽉 막히는 증상이 나타나면 답답한 감정에서 원인을 찾기보다 폐기능 이상에 관심을 기울이죠. 충동적이고 초조·불안을 크게 느낀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꼼꼼하고 예민한 한국인의 특성은 경제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됐지만, 스스로의 행복감에는 독으로 작용했다. 중앙포토

꼼꼼하고 예민한 한국인의 특성은 경제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됐지만, 스스로의 행복감에는 독으로 작용했다. 중앙포토

전홍진 교수는 “한국인 전체가 아닌 우울증 환자에 대한 연구이므로 한계가 있지만 한국인의 특성을 엿볼 수 있다. 한국은 사회적 발전이 매우 빨랐고 전쟁과 혁명 등의 큰 역사적 사건으로 국가적 트라우마가 크다. 하지만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 걸 미덕으로 생각하고 억압하는 문화다. 이때문에 감정의 억압이 신체적 이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예민함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아이작 뉴턴이나 스티브 잡스같은 사람들은 세상을 예민하게 관찰했고, 이전에 없던 결과물을 내놨죠. 전홍진 교수는 “한국인은 민감하고 꼼꼼해서 일사불란하고 신속하게 일을 처리한다. 그 장점으로 잘 사는 나라를 만들었지만 늘 불안하고 초조해하며, 행복감을 덜 느낀다. 예민함을 어떻게 통제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범죄 불안감도 마찬가지죠. 불안감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 데 기여하기도 합니다. 프리에토 쿠리엘 박사는 “범죄 불안감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불안감이 높으면 수상한 걸 보면 신고하고 행동하게 된다. 만약 불안감이 경각심 수준에 있다면 건강한 감정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많은 도시들이 범죄 불안감을 갖도록 독려하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한국인은 범죄를 불안해 했기에 안전한 나라를 만든 게 아닐까요. 다만, 그게 과해서 행복감을 갉아먹지 않기만 한다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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