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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바뀌자 “옷 벗어라” 사표강요…‘정치’인가, ‘위법’인가 [그법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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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국민의힘’으로 이름이 바뀐 자유한국당이 3년 전 고발한 ‘산업부 블랙리스트’ 사건이 임기 말 문재인 정부를 정조준하고 있습니다. 서울동부지검 형사6부(부장 최형원)가 산업통상자원부 운영지원과·혁신행정담당관실 등에 대한 강제수사에 나선 것입니다.

문재인 정부가 전 정권인 박근혜 정부에서 임명된 산업부 산하 공공기관장들에 대해 ‘사표를 내라’고 강요했다는 게 의혹의 요체입니다.

산업통상자원부의 인사 블랙리스트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이 28일 한국 남동·남부·서부·중부 발전 4개 본사에 검사와 수사관들을 보내 압수수색 중이다. 뉴스1

산업통상자원부의 인사 블랙리스트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이 28일 한국 남동·남부·서부·중부 발전 4개 본사에 검사와 수사관들을 보내 압수수색 중이다. 뉴스1

[그법알 사건번호 15] 3년 만에 시작된 文정부 ‘블랙리스트’ 수사, 처벌될까?

‘전 정권에서 임명된 산하기관장들에게 사표를 강요한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얘기입니다. 사실 새로 출범한 정부가 자신들과 손발이 맞는 사람과 일하기 위해 전 정권 사람을 내보내는 것은 과거엔 일종의 ‘인사 관행’이자 ‘정치’의 영역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죠.

지난 2008년, 이명박 정부가 공기업 사장들에게 일괄 사표를 종용한 상황에 대해 강만수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은 국회에서 “법률적 차원이 아니라 정치적 판단”이라고 해명했습니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 소속 박영선 의원은 “정치적인 판단으로 아무렇게나 사표를 받을 수 있느냐. 법률 위반”이라 몰아세웠습니다.

그런데 민주당이 여당이 되자 입장이 바뀝니다. 문재인 정부의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을 구속한 ‘환경부 블랙리스트’ 수사 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합법적인 (업무) 체크리스트’라고, 청와대는 “문재인 정부에 ‘블랙리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방어하죠.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왼쪽)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연합뉴스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왼쪽)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연합뉴스

여기서 질문

임기가 남아 있는 전 정권 산하기관장들에 대한 사표 강요. 관행이자 정치적 판단일까요, 불법 행위일까요?

관련 법률은

많이 들어보셨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직권남용)’입니다.

형법 제123조에서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에 대한 국정농단 및 적폐 수사로 정권 교체를 이끌어냈던 법리이자, 이제 문재인 정부까지도 겨냥하고 있는 문제의 법리죠.

법조계 판단은

지난 2020년 대법원이 내린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은 ‘직권남용’ 법리의 기준이 됐습니다. ‘직권’이나 ‘남용’, ‘의무 없는 일’, ‘권리행사 방해’의 개념이 모호하고 추상적인 데다 전례도 거의 없어서 재판부마다 판단이 엇갈린 탓이죠.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블랙리스트 건으로 1·2심에서 모두 유죄를 받았지만, 대법원은 직권남용죄에 대한 엄격한 심리의 필요성을 지적하면서 돌려보냈습니다. 현재는 파기환송심이 진행 중입니다. 그 기준을 살펴보겠습니다.

▶어떤 행위가 부당하거나 불법적이어야 합니다  
▶공무원의 직무상 권한(직권)의 범위에 있어야 합니다  
상급자의 지시때문에 하급자가 한 일이원칙이나 기준, 절차등을어겨야합니다.

미 결론이 난 문재인 정부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을 살펴볼까요. 이 사건은 “청와대와 환경부가 원하는 인사를 산하기관 임원직에 꽂아 넣기 위해 전 정권 때 사람들을 쫓아냈고, 후임으로 내정된 사람에 대해 자기소개서와 직무수행서까지 대신 써주는 등 각종 ‘물밑 지원’에 나섰다”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검찰, '환경부 블랙리스트' 김은경 전 장관. 연합뉴스

검찰, '환경부 블랙리스트' 김은경 전 장관. 연합뉴스

1심은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의 직권남용 혐의를 인정해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습니다. 당시 재판부는 “이 사건과 같이 계획적이고 대대적인 사표 징구(徵求·내놓으라고 요구함) 관행은 찾아볼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판결문을 살펴보면 장관의 의사를 전달받은 일선 공무원들이 ‘윗선의 뜻’이라며 서울 종로·서초·세종 등에서 박근혜 정부 때 임명된 임원들(15명)을 만나 사표를 내달라고 요구하죠.

이로 인해 실제로 13명이 사의를 밝혔습니다. 2심에서는 김 전 장관의 직권남용 혐의가 인정되는 산하기관 임원 수를 1심(12명)보다 적게(4명) 보고 징역 2년으로 감형했을 뿐 전반적인 사실관계는 동일하게 봤죠. 그리고 대법원은 지난 1월 이 같은 원심을 확정했습니다.

다만 청와대와 환경부를 겨냥한 이 사건 수사로 당시 서울동부지검의 한찬식 지검장, 권순철 차장검사, 주진우 형사6부장 등은 승진 탈락과 좌천성 보복 인사를 받게 되자 같은 해 7~8월 줄줄이 옷을 벗었습니다. 공공기관장 사표 강요 의혹을 파헤친 검사들이 거꾸로 사표를 내게 된 아이러니 상황이 벌어진 거죠.

서울동부지검이 최근 2019년 1월 고발된 산업부 블랙리스트 사건을 38개월 만에 수사에 착수한 걸 놓고 당시 동부지검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직권남용에 대한 판례가 일관성이 없다 보니 환경부 사건 결론을 보고 진행하자는 판단이 있었다”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법알

어려워서 다가가기 힘든 ‘그 법’을 콕 집어 알려드립니다. 우리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이야기로 쉽게 풀어드립니다. 함께 고민해볼만한 법적 쟁점과 사회 변화로 달라지는 새로운 법률 해석도 발빠르게 전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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