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시론

대통령의 공간은 국격의 공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함인선 광주광역시 총괄건축가·전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

함인선 광주광역시 총괄건축가·전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 때아닌 건축 명제가 나라를 달구고 있다. 지리학에는 환경결정론과 지리결정론이 있지만, 건축학의 공간결정론은 생소한 개념이다. 아마도 “우리가 건축을 만든다. 그리고 그 건축이 다시 우리를 만든다”고 했던 윈스턴 처칠의 문장에 기댄 말인 듯싶다. “청와대에 발 디디는 순간 권위주의에 포획될 것”이라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주장에 대해 “제도와 사람이 문제이지 공간이 무슨 상관이냐”는 반론이 맞붙고 있다.

두 입장 모두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처칠의 표현대로 공간과 의식은 변증법적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의식과 행동에 대한 공간의 힘은 전혀 무시할만한 것도, 그렇다고 인간의 의지를 초월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처칠의 방점은 오히려 앞부분이다. 건축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할 만큼 중요하니 지을 때 제대로 해야 한다는 뜻이다.

국방부 건물도 권위주의의 소산
용산부지 전체 다루는 전략 필요

따라서 청와대가 권위주의와 불통의 공간이니 아니니 다투며 정치적 속내를 드러내기보다 새로운 대통령 공간이 지금보다 더 민주주의적인 공간일 수 있는가를 따지는 것이 옳은 방향이다. 탈권위를 약속한 역대 정권들이 ‘탈 청와대’를 말한 첫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곳이 명당이어서다. 그 자리는 북악산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축을 조선시대 정궁인 경복궁과 같이하며 오히려 그 뒤에 앉아 말 그대로 구중궁궐 품새를 갖추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광화문 시대’를 표방했던 논리도 광화문광장에서 백악까지 ‘시민 보행축’을 열어주기 위해 옆으로 비켜앉겠다는 것이었다.

도시에서 권부(權府)의 터는 역학관계를 표상한다. 미국 워싱턴의 경우 주축인 ‘더 몰(The Mall)’의 끄트머리 언덕에 의사당이 있고 백악관은 축의 옆자리다. 왕의 권력이 의회로 이동했음을 공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프랑스 파리의 주축을 보면 샹젤리제 거리 끝의 루브르궁은 시민 공간인 박물관으로 바뀌었고, 대통령궁은 축 옆의 엘리제궁으로 갔다. 시가지 한가운데 총리 관저를 둔 영국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사례를 보면 대통령실을 용산으로 옮기는 것은 우리 체제 표현에 부합해 보인다. 용산 국방부 터는 도시의 여러 상징 축과 연관이 없는 장소이므로 대통령이 권력(power)이 아닌 직위(office)임을 표상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반면 그 건물을 그대로 쓴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공간을 논할 때는 장소만 아니라 건축적인 면을 같이 봐야 한다. 국방부 건물은 청와대 못지않은 권위적이다. 청와대가 만조백관을 굽어보는 자리에 있다면, 국방부 역시 언덕과 계단 위에 높다랗게 앉아있다. 시민들 눈높이에 있는 미국 백악관, 영국 다우닝가 10번지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더구나 국방부 건물은 엄격한 대칭 구도와 신고전주의 건축 문법으로 권위를 드러내던 구시대의 전형적인 관공서 건물이다. 서초동 법원단지 건물들도 마찬가지다. 청와대 본관은 경복궁 민속박물관, 천안 독립기념관처럼 전통 목조건축 양식을 콘크리트로 흉내 낸 건물이다.

이런 의사복고주의는 대개 민족주의를 앞세운 독재정권이 애호한 스타일이다. 이것이 청와대를 떠나야 할 또 하나의 당위라면 국방부의 지금 모습과 배치는 바꿀 필요가 있다. 어차피 관저와 영빈관도 필요할 테니 부지 전체의 그랜드플랜과 통합 건축전략을 짜야 한다.

공간은 종종 정치의 도구가 된다. 히틀러 총통이 당 대회 때 끝없는 열병 행렬과 서치라이트 불기둥을 연출한 이유는 푸틴 대통령이 독일·프랑스 정상을 4m 길이의 테이블 끝에 앉힌 이유와 같다. 공간의 스케일로 군중 또는 상대방을 압도하려는 의도다. 공간은 프로토콜(규약)이다. 국가원수가 머무는 공적 공간의 품격은 탈권위와 실용정신만으로는 얻기 어렵다. 안보와 비용만 앞세운 지금의 논의가 안타깝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함인선 광주광역시 총괄건축가·전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