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특활비 내역 공개 거부한 ‘닫힌 청와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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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선택 한국납세자연맹 회장

김선택 한국납세자연맹 회장

서울행정법원이 지난달 “청와대 특수활동비 집행 내역과 김정숙 여사의 옷값 등 의전비용, 워크숍에서 제공한 도시락 가격을 공개하라”고 판결했다. 한국납세자연맹이 소송을 제기한 지 3년 만에 나온 판결이다.

특활비는 기밀이 요구되는 국정 수행에 사용되는 예산이다. 국가정보원을 제외한 17개 정부 부처와 국회·대법원에서 모두 2471억원을 편성해 사용하고 있다. 이 제도는 여러 측면에서 납세자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한다. 우선 공무원이 영수증 없이 국가 예산을 사용하도록 허용해 사실상 ‘세금 횡령 면책권’을 준 엄청난 특혜다. 중세시대 성직자 면세 특권과 다름없다. 노르웨이 총리실에 “총리가 영수증을 첨부하지 않으면 어떤 책임을 지느냐”고 물었더니 “스스로 사임하거나 탄핵당할 것”이라고 답했다.

법원의 공개 결정에 항소로 대응
유럽에선 안 통해 … 제도개선 시급

예산 집행 내역이 공개되지 않으면 공무원의 부정부패를 감시하기 어렵다. 비공개를 용인하는 제도는 공무원에게 세금을 멋대로 쓰라고 백지수표를 준 것과 같다. 납세 의무만 지고 공무원의 예산 지출 정보를 따져볼 권리도 없다면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투명한 정보 공개는 언론 자유와 표현 자유의 바탕이다. 행위가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대통령 부인의 옷 구매에 국민 세금이 얼마나 지원됐는지 투명하게 공개하는지를 보면 그 정부의 신뢰도를 가늠할 수 있다.

물론 영부인의 옷값이 적정한지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있을 수 있다. 관련 정보가 완전하고 투명하게 공개되는 시스템을 갖춘 나라여야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공개된 정보를 놓고 토론하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확증 편향도, 좌우 진영 논리도 사라질 것이다.

특활비 오남용은 공직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잘못된 제도의 문제다. 예산을 영수증 없이 현금으로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주면 누구나 해당 예산을 사적으로 부당하게 사용할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안보 목적을 내세워 국정원 특활비를 감사의 사각지대에 마냥 방치하는 것도 정상적이지 않다. 프랑스는 국가 안보와 관련된 부처의 기밀 예산을 국회 특별위원회가 철저히 감사한다. 스웨덴의 공직 부패가 적은 것은 1766년 세계 최초로 만든 ‘정보 공개법’ 덕분이다. 조선으로 치면 영조 때다.

한국의 ‘공공 기관의 정보 공개에 관한 법률’보다 8배나 긴 분량의 스웨덴 정보 공개법에는 예외 조항인 ‘비공개 사유’를 자세히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예외 조항 외에는 무조건 공개해야 한다. 공무원의 재량 여지는 없다. 반면 한국은 공무원이 ‘수사 중’ ‘감사 중’ ‘검토 중’이라는 이유를 골라 언제든 공개하지 않을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공개해야 할 정보’를 완전히 감출 수 있는 ‘정보 비공개 핑계법’인 셈이다.

국가로부터 업무용 휴대전화를 받는 스웨덴 공무원의 경우 통화 기록 일체, 업무용 e메일 내역이 전부 정보 공개 대상이다. 정보 공개 청구를 받은 공무원은 공무상 결정 내용과 이유를 빠짐없이 공개해야 한다. 국세청 공무원이라면 세무조사 추징세액도 예외가 아니다.

청와대 특활비 내역 등을 공개하라는 법원 판결이 나왔지만, 안보 문제 등을 내세워 청와대가 항소했다. 청와대는 “영부인 옷값은 사비로 부담했고, 특활비 지출은 없었다”고 주장하며 내역 공개를 계속 거부하고 있다. 문 대통령 임기 만료로 관련 정보가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되면 정보 공개 소송 중이라도 법에 따라 15년 이상 공개가 어려워질 수 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촛불 정신’을 존중한다면 법원의 공개 결정을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군색한 변명으로 정보 공개를 회피할 일이 아니다. 청와대는 특활비 내역을 모두 공개해 모범을 보이고, 다른 국가기관의 특활비 공개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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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택 한국납세자연맹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