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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 값 루블화로만 내라"…푸틴의 추락하는 '루블화 구하기'

중앙일보

입력

러시아가 '루블화 구하기'에 나섰다. 천연가스 수출 대금으로 루블화만 받겠다고 했다.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루블화를 떠받치기 위해 가장 강력한 '패'인 에너지를 꺼내든 것이다. 하지만 별다른 효과 없이 러시아 경제의 숨통을 죄는 자충수가 될 수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지난달 24일(현지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내 군사작전을 선언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 러시아 대통령실 공식 홈페이지에 개시됐다. [AFP=연합뉴스]

지난달 24일(현지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내 군사작전을 선언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 러시아 대통령실 공식 홈페이지에 개시됐다. [AF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23일(현지시간) “비우호국들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 대금 지급 방법을 루블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러시아의 비우호 국가 목록에는 EU와 영국, 미국 등이 포함돼 있다. 특히 유럽연합(EU)은 천연가스의 약 40%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그동안은 주로 유로화로 결제했는데, 앞으로 루블화를 직접 구해 결제하란 주문이다.

푸틴 발언에 루블화 8% 반짝 반등  

루블화 결제란 초강수를 둔 건 날개 없이 떨어지고 추락하는 루블화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한 조치다. 클라우스 비스테센 판테온 거시경제부 수석 이코노미스는 “이러한 조치는 서방 국가가 석유 한 배럴을 살 때마다 루블화 가치를 올리겠다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지난달 28일에는 루블화 폭락을 막기 위해 기준금리를 연 9.5%에서 연 20%로 한 번에 큰 폭으로 인상했다. 하지만 국제은행간통신협의회(SWIFT) 배제 등 강력한 경제 제재에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우크라이나 침공 전만 해도 달러당 75루블 수준이던 루블화 가치는 달러당 130루블 아래로까지 떨어졌다(환율 상승).

루블화 추이.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루블화 추이.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푸틴의 발언에 힘입어 루블화는 '반짝' 급등하는 모습이다. 인베스팅닷컴에 따르면 23일 종가 기준으로 루블화 가치는 전날보다 8.73% 오른 달러당 96.75루블을 기록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튿날인 지난달 24일(달러당 84.95루블) 이후 가장 높은 수준까지 올랐다.

러시아와 거래 끊는 상대국들...악수 되나 

하지만 가스 대금 루블화 결제가 장기적으로는 큰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러시아는 이미 달러와 유로로 (수출 대금을) 결제하는 자국 기업에 수익의 80%를 루블화로 교환할 것을 요구해왔기 때문에 큰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수입하는 상대국이 루블화로 바꿔서 비용을 내느냐, 러시아 기업들이 해외에서 달러를 받아 루블화로 바꾸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 루블화 수요 자체에는 큰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상대방에게 루블화로 바꿔서 결제하라는 요구는 환전 등의 부담을 러시아 중앙은행이나 러시아 기업이 아닌 상대방에게 떠넘긴다는 점에서만 다를 뿐이다.

오히려 루블화 결제가 장기적으로는 러시아 경제를 위태롭게 할 악수(惡手)란 평가도 나온다. 러시아는 세계 3대 석유생산국이자 세계 최대 천연가스 수출국이다. 이 '에너지 차르' 지위를 전쟁에서 무기 삼아 휘두르고 있지만, 결국 거래국의 반발을 사면서 장기적으로 러시아의 에너지 패권이 무너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거래국 중 일부는 러시아의 일방적인 조치에 거래를 끊겠다는 입장도 불사하고 있다. 폴란드 정부의 한 고위 소식통은 CNBC에 "이는 현행 계약에 포함된 지불 규정을 위반하는 것"이라며 "현재 장기 계약이 올해 말 만료되면 (러 국영 가스업체인) 가즈프롬과 새 계약을 체결할 의사가 없다"고 말했다.

에너지 정보업체 라이스타드 에너지의 비니시우스 호마누 선임연구원은 "루블화 결제를 강요할 경우 구매자들은 계약서를 다시 점검할 테고, 그들이 러시아산 가스에서 더 빠르게 손을 떼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독일은 지난 20일 러시아 대신 카타르와 액화천연가스(LNG)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영국 에너지 회사 BP와 네덜란드 셸, 프랑스 토탈에너지 등은 올 연말로 끝나는 러시아와의 경유·원유 공급 계약을 갱신하지 않기로 했다.

석유 전문가 다니엘 예르긴 IHS마킷 부회장은 영국 이코노미스트 기고문에서 “러시아가 20년 이상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자로 쌓아왔던 명성을 불과 수주 만에 무너뜨렸다”고 했다.

주요국 대러시아 제재 주요 내용.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주요국 대러시아 제재 주요 내용.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한편 미국의 대러시아 경제 제재 수위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미국 재무부가 러시아의 금 자산을 동결하는 법을 의회와 논의할 예정이라고 지난 23일 뉴욕타임스(NYT)가 보도했다. 미 상원은 1300억 달러(약 158조4700억원) 상당의 러시아 금 보유고가 러시아 중앙은행에 부과된 제재의 허점이라고 보고 있다. 이 금을 팔아 경제 제재를 무력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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