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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밤새 죽음의 벼랑 끝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다" [별★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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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불어서 많이 추우시죠. 옷은 따뜻하게 입고 오셨나요.”
이윤미(63·여)씨가 수화기 너머 여성에게 다정히 말을 건넸다. 처음 통화하는 생면부지의 상대지만, 그의 처지를 이씨는 대략 알고 있다. 한강의 한 다리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고민하다가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들었을 것이다.

이씨는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에 서 있는 사람의 전화를 받는다. 세 달 전 전화를 건 여성은 이씨와 통화한 뒤 다행히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씨는 “극단 선택을 하려는 순간을 넘기면 다음 기회가 있다. 하지만, 못 넘기면 영원히 기회가 없는 셈이다. 그 순간을 넘기도록 돕는 게 제 역할”이라고 말했다.

한강 교량에서 걸려온 전화

이윤미(63)씨는 극단선택이 자주 발생하는 한강교량에 설치된 SOS생명의전화를 받는 상담원이다. 지난 3일 서울 성북구에 있는 한국생명의전화에서 이씨를 만났다. 함민정 기자

이윤미(63)씨는 극단선택이 자주 발생하는 한강교량에 설치된 SOS생명의전화를 받는 상담원이다. 지난 3일 서울 성북구에 있는 한국생명의전화에서 이씨를 만났다. 함민정 기자

이씨가 받은 SOS 생명의전화는 극단선택 예방을 위한 ‘긴급상담전화기’다. 한강 교량 중 극단선택이 자주 발생하는 곳에 설치돼 있다. 전국 20개 한강 교량에 총 75대의 전화기가 24시간 365일 운영 중이다.

상담원마다 다르지만, 이씨는 2주에 1번꼴로 사무실에 출근해 오후 8시부터 이튿날 오전 8시까지 전화를 받는다. 밤에는 이씨처럼 보수를 받지 않고 봉사를 진행하는 상담원 등이 2인 1조로 구성돼 전화를 받는다. 낮에는 사무국 직원들이 전화를 받는다.

지난 3일 서울 성북구에 있는 한국생명의전화에서 만난 이씨는 “개인적인 상담 사례는 상담자의 비밀 보장을 원칙으로 해 공개 가능한 선에서 답변한다”고 기자에게 양해를 구했다.

두려웠던 전화벨, 손잡아달라는 신호로 생각

이윤미(63)씨는 극단선택이 자주 발생하는 한강교량에 설치된 SOS생명의전화를 받는 상담원이다. 함민정 기자

이윤미(63)씨는 극단선택이 자주 발생하는 한강교량에 설치된 SOS생명의전화를 받는 상담원이다. 함민정 기자

국회방송과 KTV국민방송에서 프리랜서 작가로 일했던 이씨는 국회에서 자살예방을 위한 ‘생명사다리 범국민 캠페인’을 접하게 됐고, 교육을 받은 뒤 상담원으로 활동하게 됐다. 그는 “출근 첫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3시간 30분의 근무 시간이 마치 10년 같았다. 노트가 눈에 안 들어올 정도로 당황스러웠다”고 했다. 그때의 긴장감은 올해로 6년째인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초창기에는 전화벨 소리가 두려웠다고 한다. 긴급할 때 대처를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느끼던 때 한 동료 상담원이 이씨에게 용기를 줬다. “전화가 와서 다행이다. 내 목소리로 위로를 받으셨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라는 조언이었다. 이씨는 “전화는 결코 무서운 일이 아니다. 살려달라는 절규이자, 손을 잡아달라는 소중한 신호”라고 말했다.

전화로 전해지는 바람과 울음 소리

서울 성북구 한국생명의전화 건물 내에 있는 SOS생명의전화 상담실. 함민정 기자

서울 성북구 한국생명의전화 건물 내에 있는 SOS생명의전화 상담실. 함민정 기자

벼랑 끝에 선 이들의 마음을 돌리는 일은 쉽지 않다고 한다. 이씨에 따르면 한 상담자는 도봉구에서 한강 다리까지 걸어온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얼마나 비장한 마음으로 왔겠나”라고 했다. 상담자 다수가 전화하며 울음을 터뜨리고, 바람 소리가 커 목소리가 안 들릴 때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씨는 “수화기를 들었다가 놓고 사라질 때도 있다. 생사가 확인될 때까지 일이 손에 안 잡힌다”며 “CCTV 화면을 보고 통화하는 여건이 아니어서 현장을 알지 못해 답답할 때도 있다”고 했다.

2년간의 코로나 시국에 이씨는 2030 남성들로부터 전화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대면 활동이 줄고 취업이 어려워진 상황이 반영된 것 같다는 게 이씨의 생각이다. SOS생명의 전화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10~30대의 전화 비율이 높은 편”이라고 했다.

SOS생명의 전화 상담통계.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SOS생명의 전화 상담통계.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양화대교에서 멈췄던 남학생, “한 번 더 했더니 취업” 감사 전화

지난해엔 한 남학생이 취업문제로 어려움을 겪다가 양화대교에서 전화를 걸었다. 동료 상담원은 “한 번만 더 (취업을) 도전해 보자”고 다독였다. 6개월 뒤 이씨는 이 남학생의 전화를 다시 받았다. 남학생은 “투신하려던 순간, ‘한 번만 더 해보자’는 말을 듣고 그 말대로 했더니 합격했다”며 울먹였다고 한다. 이씨는 “가슴이 벅차올라 같이 울었다”고 회상했다.

아직은 구멍이 많은 사회 안전망에 대한 아쉬움도 크다고 했다. 이씨는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분들이 한강에 와 전화를 건 사례를 많이 봤다. 통화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을 때 안타까웠다. 이들을 위한 지원 범위가 넓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씨는 자신을 “생(生)과 사(死)의 경계선에서 싸우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이어 “오늘 밤은 이 다리에서 생을 마감하는 이가 없도록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별톡.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별톡.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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