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최훈 칼럼

대통령의 성패, 인사가 가른다

중앙일보

입력 2022.03.15 00:40

업데이트 2022.03.15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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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훈 기자 중앙일보 주필
최훈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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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되는 것은 달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타는 것이다. 계속 달리거나 아니면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게 된다.”(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 “대통령은 맹수를 돌보는 사육사와 같다. 먹이를 주지 못하게 되면 맹수는 사육사의 손을 물어 뜯는다.”(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대통령과 민심은 묘한 애증의 관계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에겐 정권교체의 성취감도 잠깐, “어깨가 짓눌리는 것 같다”는 토로대로 쉽잖은 시간이 이어질 터다. 어느 때보다 포용과 통합, 여소야대 의회와의 협치란 고난도 수성(守城)의 길을 번민해야 할 상황이다. 난관을 헤쳐나갈 모든 리더의 수단은 인사다.

국정 방향 선명한 메시지가 인사
능력·전문성·적재적소 기본에다
내 사람만 고집 않는 탕평을 기대
레이건·노태우의 인사 참고하길

532만 표(22.6%) 차이로 압승한 이명박 정부의 초대 청와대는 수석 7명 중 6명이 미국 박사 교수 출신 명망가로 화려했다. 그러나 현장 민심에 둔감했다. 미국산 쇠고기 파동의 직격탄에 취임 4개월도 안 된 대통령비서실장의 사퇴로 그로기 상태가 되고 말았다. 빅3 권력기관장(검찰총장·국정원장·경찰청장)이 영남 출신에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정권”이란 역풍으로 취임 100일 지지도가 20%. 국정 동력의 조기 고갈이었다.

첫 과반 득표를 이뤄낸 박근혜 정부 역시 인수위원장 겸 초대 총리 지명자가 닷새 만에 낙마하고 각료 7인의 하차가 이어지며 대통령비서실장이 6개월의 단명을 맞았다. 두 대통령 모두 친이·친박의 최측근(류우익·허태열)을 비서실장에 앉혔으나 전체적 인사 난맥의 돌풍에 무너져 갔다. 실패한 권력 운용의 공통점은 지나치고 광범위한 자기 사람 심기다. 김영삼·김대중·박근혜 대통령 때도 사정 권력기관장들과 핵심 경제부처장들을 당선에 빚진 부산·경남과 호남, 대구·경북 일색으로 채워 편중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는 친문 진보 진영 일색의 인사 독점 편가르기로 호랑이 같은 민심의 심판을 불렀다.

인재가 모든 출신의 역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 하지만 대통령의 인사는 국정 방향의 선명한 메시지다. 정권의 지역 차별 트라우마가 컸던 한국의 대통령은 능력에 따른 적재적소와 함께 통합과 탕평, 균형과 조화도 배려하라는 게 역사의 교훈이었다. “젊은 내각, 당을 만들겠다”는 윤 당선인의 일성은 늙은 보수의 새피, 세대 교체 기대를 낳고 있다. 지역색 없는 서울 출생에 정치권의 빚도 별로 없는 그에게 초유의 통합 인사를 고대해 보는 이유다.

성공의 모델은 노태우 정부 초기 내각과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1기다. 노 대통령은 미문화원 점거 학생들을 감쌌다며 경질당한 이현재 전 서울대총장을 총리로 발탁했다. 5공의 상처를 치유하고 통합으로 가자는 메시지였다. 비서실장도 이북 출신에 무교동 순댓국집의 소탈한 소줏잔 소통이 돋보였던  ‘홍코’ 홍성철 예비역 해병대령을 기용했다. 당시 입각했던 이홍구 통일원장관, 최호중·이상옥 외무장관 등은 남북대화의 영구적 전범인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한·러, 한·중 수교 등의 북방정책 성과를 일궈냈다. 사공일(재무)·이봉서(동자)·이관(과기처)·오명(체신) 장관 등도 5년 평균 8.5%의 경제 성장과 한국산업, 과학기술의 도약을 이끌었다. 초대 문화부장관 이어령 교수로 지성인 행정가의 시대도 열었다.

무엇보다 이홍구·사공일 등의 각료들은 YS·DJ·JP의 야당과 적극적으로 소통했다. 사공 전 재무장관은 “당시 국회 재무위원 29명 중 야당이 17명”이라며 “요즘도 당시 친밀했던 야당 원로들과 교유하며 지낸다”고 말했다. 소통·화합형 인사가 협치의 동의어였다. 사공 전 장관은 “당시 장관에겐 차관·청장·국장 인사 전권과 책임을 주어 의회 교섭에서도 힘을 갖고 임했다”며 “대통령실 수석·보좌관과 해당 분야 장관의 호흡, 팀웍 인사가 가장 중요하며 새 정부엔 여소야대 의회와의 소통을 활성화할  정무장관직이 필요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레이건의 국정 중추 역시 국무회의였다. 국무부의 공식 절차를 무시했던 닉슨의 키신저, 카터의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 등 최측근들이 각료를 흔드는 옥상옥(屋上屋)을 지켜봤던 레이건은 “백악관 참모란 각료를 보조하는 역할이어야 한다”고 성찰했다. 포드 전 대통령은 “비밀 털어놓고 조언을 구할 대통령의 절친, 최측근들은 반드시 내각의 밖에 두라”고 그에게 조언했다.

레이건 국무회의는 주 1회 거수기 모임이 아니었다. 최대 매주 4~6회 정도의 국무회의에 참석, 각료들과 격의없는 대화로 소통했다. 우리 정치의 고질인 독대(獨對) 실세, 비선 타령이 나올 리 없었다. 대통령 직속의 8개 정책별 위원회(Cabinet Councils)로는 내각보다 호흡이 긴 중장기 정책의 아이디어를 일궈냈다. 피라미드 아닌 대통령 중심의 부챗살 소통망 구축이다. 능력·전문성 우선의 레이건 내각은 동부 6명, 서부 4명에 레이건 공화당의 아성이던 남부 출신은 1명만 발탁했다. 실패를 막는 건 이 같은 절제의 미덕이다(『성공하는 대통령의 조건』 『로널드 레이건 평전』 등).

인사에 정답이란 없다. 하지만 사람이 모든 일의 처음이자 끝이라는 건 정답이다. 일정의 포로인 대통령의 가장 큰 자산은 시간. 그 소중한 자산을 인사의 고뇌에 한껏 써주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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