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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당한 방역전문가, 그 후임자는 왕족...노벨상 수상작가의 팬데믹 소설

중앙일보

입력

페스트의 밤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민음사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오스만 제국에 속한 지중해의 섬 민게르에 페스트가 번진다. 때는 1901년. 백신은커녕 치료법도 없다. 감염된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병에 걸렸는지도 모른 채 극심한 고통을 겪다가 불과 며칠 만에 목숨을 잃는다. 파디샤, 즉 오스만 제국 최고 통치자가 파견한 두 방역 전문가가 섬에 도착하지만, 곧 그중 한 사람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후임자가 되는 것은 최고 통치자의 조카와 최근 결혼한 의사다. 신혼인 이 부부는 마침 오스만 제국의 사절단으로 중국에 가는 길이었는데, 페스트를 퇴치하고 살인의 배후를 밝히는 새로운 임무를 맡아 중국 대신 민게르에 상륙한다.

소설 '페스트의 밤' 의 저자 오르한 파묵. [사진 민음사]

소설 '페스트의 밤' 의 저자 오르한 파묵. [사진 민음사]

이렇게 펼쳐지는 『페스트의 밤』은 터키의 노벨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묵의 신작 소설이다. 전염병을 두고 소설 속에 벌어지는 갈등은 지금 시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곳곳에서 겪은 일을 저절로 떠올리게 한다. 섬을 다스리는 총독은 전염병 발생 사실부터 숨기려 하고, 섬에는 외지인 방역전문가가 병을 퍼뜨렸다는 것을 비롯해 온갖 거짓 소문이 퍼진다.

120년전 페스트, 지금 팬데믹과 닮은꼴

낯익은 건 이뿐만 아니다. 전염병의 책임을 외부에 돌리고, 감염에 무지한 상태로 방역을 무시하고, 외부 확산을 막기 위해 섬을 봉쇄하고, 봉쇄 전 탈출하기 위해 별별 수단을 동원하고, 섣부른 방역완화로 재앙을 키우는 일도 등장한다. 특히 기독교도와 함께 섬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무슬림의 지도자들은 감염 확산에 치명적인 장례법만 아니라,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는 식의 운명론으로도 방역에 장애물을 만든다.

오르한 파묵이 직접 그린 그림. '페스트의 밤' 한국어판에 표지 그림으로 실렸다. © Orhan Pamuk

오르한 파묵이 직접 그린 그림. '페스트의 밤' 한국어판에 표지 그림으로 실렸다. © Orhan Pamuk

정작 작가가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16년. 팬데믹 이전이다. 그는 2년 전 뉴욕타임스에 실린 기고문에 이렇게 썼다. "인간과 문학의 역사를 통틀어 전염병을 비슷하게 만드는 것은 세균과 바이러스의 단순한 공통점이 아니라 우리의 초기 반응이 항상 같았기 때문"이라고.

이 소설은 전염병이 창궐하는 세상과 이를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동서양과 오스만 제국을 아울러 당시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민게르는 실제로 존재하는 지명이 아니지만, 서양 열강에 밀려 영토가 계속 줄어드는 오스만 제국의 대외적 상황을 포함한 실제 역사가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과 맞물린다.

가상의 섬, 실제의 역사...그 경계는 

그러나 이 소설에서 가상의 역사와 실제 역사를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오스만 제국부터 지금의 터키까지 이 지역의 역사 전반이 우리에게 낯선 데다, 작가의 치밀하고 생생한 묘사는 민게르의 구석구석을 직접 다녀보고 쓴 것처럼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장장 800쪽에 가까운 소설의 전반부는 여러 등장인물이 살아온 내력까지 마치 세밀화를 그려내듯 상세하게 차근차근 들려준다. 페스트로 난리가 난 와중에도 누군가는 대담한 사랑에 빠지고, 누군가는 은밀한 밀회를 이어간다. 대담한 사랑에 빠진 젊은 군인은 훗날 역사에 영웅으로 기록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소설의 속도는 후반부에 급속히 빨라진다. 민게르 민족주의를 내건 뜻밖의 '혁명'을 시작으로 일련의 정치적 격변이 폭풍이 몰아치듯 시작된다. 정치적 격변에 종종 뒤따르는 암살과 교수형, 그리고 페스트로 인한 죽음까지 작용해 섬의 정치적 상황은 격변에 격변을 거듭한다.

역사와 거리두기 하는 역사소설 

역사 소설로서 이 작품에는 독특한 장치가 있다. 이 책의 첫머리는 이 소설을 쓴 '나'를 민게르의 역사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여성이라 소개한다. '나'에 따르면, 소설의 재료가 된 것은 최고 통치자의 조카가 언니에게 쓴 113통의 편지를 포함한 당시의 실제 기록들이다. 그래서 '나'는 소설의 전개과정 속에서 앞으로 닥칠 일을 이미 알고 있다는 기색을 종종 드러낸다.

소설 '페스트의 밤' 의 저자 오르한 파묵. [사진 민음사]

소설 '페스트의 밤' 의 저자 오르한 파묵. [사진 민음사]

소설의 끝자락은 더욱 의뭉스럽다. 1901년 이후 현재에 이르는 민게르의 역사, 즉 가상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소개하는 한편 소설의 실제 작가인 오르한 파묵을 이 소설과 무관한 별개의 존재로 언급하기도 한다. 이런 식이다. "역사를 좋아하는 소설가 오르한 파묵은 1980년대 박물관에서 오 분 거리인 니샨타쉬에 있는 집에서 일주일에 한 번 강박적으로 그곳을 방문하곤 했다고 내게 말했다"(742쪽)

이 독특한 장치와 더불어 소설은 실제이든 가상이든 그 안에 담긴 역사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소설을 쓴 '나'는 민게르 민족주의자를 자처하더라도, 이 소설이 민족주의에 열광하진 않는다. 소설 속 혁명 영웅에 대해서도 소설 자체가 그를 영웅시하는 대신 그의 일화가 신화화된 과정을 묘사한다. 역사 소설의 독자가 가끔 그렇듯, 현실과 직결되는 비판이나 손에 잡히는 교훈을 기대하는 독자의 욕망을 이 소설은 묘하게 비껴간다. 대신 실제와 가상의 역사를 고루 재료로 삼아 거대하고 정교한 미니어처처럼 구축한 이 세계, 소설 속 세계 자체가 충분한 볼거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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