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셋이 모이면 드라마가 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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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세 친구의 ‘워맨스’를 내세워 MZ 세대 여성 시청자들의 판타지를 구현한 드라마. ‘서른, 아홉’(JTBC). [사진 각 방송사]

세 친구의 ‘워맨스’를 내세워 MZ 세대 여성 시청자들의 판타지를 구현한 드라마. ‘서른, 아홉’(JTBC). [사진 각 방송사]

공황장애 치료를 위해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낼 계획이던 피부과 의사 미조(손예진)는 친구 찬영(전미도)이 말기 암 판정을 받자 미국 행을 포기한다. 그 1년을 찬영의 마지막 시간을 돌보는 데 쓰기로 결정했다. 친구 주희(김지현)는 4등 당첨 복권을 파쇄기로 갈아버렸다. 그 행운을 찬영에게 주고 싶어 당첨금 750만원을 포기했다. “내 인생에서 처음 찾아온 행운, 너 가져가. 그래서 4년만 더 살아.”

JTBC 수목 드라마 ‘서른, 아홉’ 속 장면들이다. 세 친구 우정이 절절하다. 시한부 생명, 출생의 비밀, 새로 시작하는 사랑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입양 문제 등 다양한 극적 요소를 품었지만, 기본 틀은 이들의 ‘워맨스(워먼+로맨스)’다. 최근 안방극장의 대세인 ‘여자 셋’ 코드를 앞세웠다. 세 인물의 서사를 골고루 설득력 있게 보여주면서 이들 간 연대의 힘을 강조했다. 이런 점에서 화제작 ‘멜로가 체질’(JTBC), ‘술꾼도시여자들’(티빙)의 맥을 잇는다.

세 드라마는 공통점이 많다. 세 친구가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고, 누군가 위기에 처하면 서로 한달음에 달려가 돕는다. ‘멜로가 체질’에선 세 친구가 아예 한집에 살았다. ‘술꾼도시여자들’에선 셋 중 둘이 동거한다. ‘서른, 아홉’은 각자 따로 살지만, 걸핏하면 짐을 싸 들고 한 집에 모인다. 일과 후엔 으레 술 한 잔을 함께하며 시간을 보낸다.

드라마에서 부모는 친구보다 한 다리 멀다. 애틋하고 그리워하지만, 고민을 나누는 사이는 아니다. 해결사 역할도 늘 친구 몫이다. 각자의 사회·경제적 능력은 서로를 돕는 밑천이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에선 아버지 등 남자 힘을 빌어야 했던 일이다. 연인도 친구보다 중요하진 않다. 지난 3일 ‘서른, 아홉’ 6회 방송에서 미조는 남자 친구 선우(연우진)와 캠핑을 가다 말고 돌아왔다. 주희가 갑자기 회사를 그만뒀다는 전화에, 결국 캠핑을 접고 친구를 만나러 갔다.

이영미 대중문화평론가는 “가족 해체가 급격히 진행되는 상황에서 꼭 결혼하지 않아도 ‘유사 가족’을 통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젊은 여성의 바람을 반영한 설정”이라고 평가했다. 고령층 시청자의 대가족 판타지를 충족하는 가족드라마가 한때 주류였듯, 이젠 MZ세대 여성 시청층의 환상을 반영한 ‘워맨스’ 드라마가 늘어난다고 분석한다. 드라마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 교수는 “각자도생 시대, 경쟁에 지친 시청자에게 연대와 소통의 가치를 보여주는 콘텐트”라며 “서로 힘이 돼주는 모습을 그릴 때 남성보다 여성을 등장시키는 게 개연성을 부여하기 더 쉽다”고 말했다.

세 친구의 ‘워맨스’를 내세워 MZ 세대 여성 시청자들의 판타지를 구현한 드라마. ‘술꾼도시여자들’(티빙). [사진 각 방송사]

세 친구의 ‘워맨스’를 내세워 MZ 세대 여성 시청자들의 판타지를 구현한 드라마. ‘술꾼도시여자들’(티빙). [사진 각 방송사]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도 세 드라마의 공통된 특징이다. 세 인물이 주·조연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균형 있게 다뤄진다. 같은 ‘여자 셋’ 드라마지만 송혜교가 원톱이었던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SBS)와 사뭇 다르다. 물론 흐름의 중심인물은 있다. ‘서른, 아홉’의 미조, ‘멜로가 체질’의 진주(천우희), ‘술꾼도시여자들’의 소희(이선빈) 등이다. 이들의 로맨스가 드라마를 이끌면서 상대역들(각각 연우진, 안재홍, 최시원)이 남성 등장인물 중 가장 비중이 크다.

세 친구의 ‘워맨스’를 내세워 MZ 세대 여성 시청자들의 판타지를 구현한 드라마. ‘멜로가 체질’(JTBC). [사진 각 방송사]

세 친구의 ‘워맨스’를 내세워 MZ 세대 여성 시청자들의 판타지를 구현한 드라마. ‘멜로가 체질’(JTBC). [사진 각 방송사]

나머지 두 친구 중 한 명이 무거운 분위기와 서사를 맡는다. ‘서른, 아홉’의 찬영, ‘멜로가 체질’의 은정(전여빈), ‘술꾼도시여자들’의 지구(정은지) 등이다. 찬영은 말기 암 판정을 받았고, 은정은 남자 친구를 암으로 잃었다. 지구는 제자의 자살 겪은 뒤 종이접기 유튜버가 됐다. 모두 친구들 도움으로 상처를 극복한다. 남은 한 명은 통통 튀는 캐릭터다. ‘서른, 아홉’의 주희, ‘멜로가 체질’의 한주(한지은), ‘술꾼도시여자들’의 지연(한선화) 등이다. 자칫 ‘민폐 캐릭터’가 될 것 같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외유내강’ 스타일이 매력이다.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여성 셋을 등장시키는 게 워맨스 드라마의 전형적인 구도”라며 “로맨스가 주축인 드라마는 메인과 서브, 여성 둘로 충분하지만, 우정과 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둘로 부족하다”고 말했다. 이영미 평론가도 “동성의 인물 관계를 그릴 때 ‘3’이 이야기 만들기 가장 편한 숫자다. 등장인물의 속마음을 보여줄 방법도 다양하게 구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여자 셋’ 드라마는 이어질 전망이다. 9일 처음 방송하는 ‘킬힐’(tvN)은 쇼호스트 세계에서 벌어지는 세 여자(김하늘·이혜영·김성령)의 욕망과 경쟁을 그린다. 또 세 자매(김고은·남지현·박지후)를 등장시킨 ‘작은 아씨들’(tvN)도 올 하반기 방송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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