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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빈종이 온거죠" 선거 공보물 받은 시각장애인의 한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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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테는 그냥 빈 종이가 온거죠. 읽을 수가 없으니까요.”
시각장애인 서모(26)씨가 지난달 27일 20대 대통령 선거 공보물을 받았을 때의 심경이다. 그가  받은 책자형 공보물은 ‘비장애인용’이었다. 표지 우측 상단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변환용 QR코드’가 있었지만, 그걸 인지할 점자가 없었다. QR코드가 있다는 걸 알고도 이용하기가 힘들었다. 서씨는 “점자로 표시되지 않았는데 QR코드 위치를 어떻게 알겠어요”라고 말했다.

20대 대통령선거 책자형 선거공보물 우측 상단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변환용 QR코드가 기입돼 있다. 빨간색 원으로 표시한 것이 QR코드다.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실 제공

20대 대통령선거 책자형 선거공보물 우측 상단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변환용 QR코드가 기입돼 있다. 빨간색 원으로 표시한 것이 QR코드다.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실 제공

하루 앞으로 다가온 20대 대통령 선거에 임하는 시각장애인들은 착잡할 수밖에 없다. 이번 선거에서도 점자 공보물에 오타가 있었고, 수어 통역이 없는 개표 방송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선거 공보물 점자 오기, 미기재…답답한 시각장애인들 

20대 대통령선거의 시각장애인용 점자 공보물(왼쪽)과 USB형 공보물(오른쪽)의 모습.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실 제공

20대 대통령선거의 시각장애인용 점자 공보물(왼쪽)과 USB형 공보물(오른쪽)의 모습.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실 제공

시각장애 선거인의 참정권 보장을 위한 수차례의 ‘개혁’ 조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치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게 시각장애인들의 주장이다. 앞서 2020년 12월 공직선거법 개정으로 시각장애인은 ▶문자‧음성으로 공약을 담은 이동저장장치(USB)를 점자 공보물과 함께 받을 수 있게 됐고 ▶일반 공보물 상단에도 음성변환용 QR코드가 기입됐다. 점자형 선거공보물의 면수도 늘어나 책자형 공보물과 같은 수준의 정보를 제공 받을 수 있게 된 것도 성과였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여전히 녹록지 않다”는 말이 나온다. 오기는 기본이고 USB 공보물 겉면엔 후보‧정당의 정보가 점자로 표시되지 않은 경우가 있다. 시각장애인 이창훈(37)씨는 “한 줄에 몇 개씩 오타가 있으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 어려웠다”며 “검수가 안 됐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또 “USB 공보물 등을 제공하는 건 분명 진보한 일이지만, 모든 후보가 보낸 것은 아니다”고도 했다.

USB 제공은 현행법상 의무가 아니다. 후보자가 의무적으로 제출해야 하는 점자형 공보물은 일반 공보물에 음성변환용 QR코드를 심는 것으로 대체가 가능한데, QR코드는 시각장애인들이 위치를 찾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화려한’ 개표 방송, 청각장애인은 ‘혼란’

8일 오후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장애의벽을허무는사람들, 원심회 관계자 등이 21대 총선 개표방송 수어통역 미제공 차별진정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8일 오후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장애의벽을허무는사람들, 원심회 관계자 등이 21대 총선 개표방송 수어통역 미제공 차별진정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화려한’ 선거 방송에 청각장애인들은 좌절하기도 한다. 컴퓨터그래픽(CG)이나 특수효과가 넘치는 개표 방송이 오히려 정보 구분을 힘들게 한다는 것이다. 청각장애인 윤정기(56)씨는 “개표 방송에 그래픽이 많아져 한눈에 득표율을 파악하기 힘들었다”고 했다. 한국농아인협회 관계자는 “3D에 메타버스 등 디지털 방식의 개표 방송이 이뤄지는데, 농아인 입장에서는 많은 디지털 정보가 더 혼란스럽다”고 덧붙였다.

장애인권단체 ‘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람들’은 지난 7일 “지상파 방송사는 개표방송에 수어통역을 해야 한다”는 입장문을 냈다. 이들은 “개표방송도 선거방송의 일부”임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지난 19대 대선 개표방송에서 수어통역을 한 방송사는 없었고, 2020년 4월 치러진 21대 총선도 마찬가지였다”고 지적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해 10월 KBS에 선거개표방송에 수어통역을 제공해야 한다고 권고한 상태다. KBS 관계자는 “이번 선거 방송에서는 수어통역이 제공될 것”이라고 말했다.

“장애인 선거 접근성 더 높여야”

장애인의 선거 접근성 개선에 대한 목소리는 선거 때마다 나오고 있다. 한국농아인협회 관계자는 “개표방송에 수어통역을 하는 것이 제일 좋고, 그렇지 못한 경우 정보를 쉽게 인식할 수 있는 ‘간략한 화면 구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는 “시각장애인의 참정권 보장을 위해 점자 공보물의 ‘품질 전수조사’ 실시를 요구한다. 후보자들도 공인된 점자출판시설에서 점자형 공보를 제작할 것을 촉구한다”고 했다.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은 “사회적으로 장애 감수성이 낮은 부분들이 있는 것 같다. 공직선거법상 USB 공보물 등은 의무가 아닌 탓에 시각장애인에게 제공된 공보의 형태가 후보마다 달랐다”며 “점자와 USB 공보물 모두 책임 기관에서 검수를 제대로 할 수 있도록 개선점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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