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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조희연의 반박불가

부족합니다, 그래도 교실은 바뀌고 있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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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어교육을 비판하는 강성태 '공부의신' 대표의 글에 대한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의 답글입니다.

강성태 공부의신 대표의 글을 찬찬히 읽었습니다. 영어교육에 대한 열정이 묻어나는 글이었습니다. 저 역시 “입시는 제로섬 게임”이라는 강 대표의 지적에 공감합니다. “똑똑하고 성실하고 예의 바른” 우리 학생들을 좌절로 몰아넣는 구조에 대해 깊은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계층에 따른 영어 노출 기회의 차이가 진학과 취업, 승진 기회의 격차로 이어지는 현실 역시 몹시 답답합니다. 강 대표의 글이 더욱 활발한 토론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하지만 오해도 있더군요. 서울시교육청이 영어교육에 많은 예산을 써 왔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영어교육 예산이 국어교육의 160배나 되는 건 아닙니다. 올해 서울시교육청의 영어교육 관련 예산은 약 298억원이며, 국어교육 관련 예산은 약 100억원입니다. 물론 이렇게 많은 예산을 쓰는데 영어 울렁증에 시달리는 학생이 많다는 지적은 반박하기 어려운 사실이긴 합니다.

다만 학교의 영어 수업이 많이 달라졌다는 점은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학부모들이 과거 경험했던 문법 위주 영어 수업은 이제 거의 사라졌습니다. 서울시교육청은 희망하는 모든 공립초등학교에 원어민 영어 보조교사를 배치했습니다. 사교육에서 소외된 학생을 위한 방학 중 영어 캠프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원어민 교사가 함께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아울러 모든 공립초등학교에 영어학습교구 구입비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서울시교육청 소속 원어민 보조교사. [사진 서울시교육청]

서울시교육청 소속 원어민 보조교사. [사진 서울시교육청]

앞으로 달라질 부분도 말씀드리겠습니다. 강 대표가 잘 지적한 것처럼, 어떤 학생들은 어릴 적 외국 생활이라든지 가정 교육의 영향으로 입학 후 따로 영어 공부를 하지 않아도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합니다. 그렇게 절약한 시간에 수학 등 다른 과목을 공부해서 입시 성적을 잘 받는 학생도 적지 않습니다. 이 학생들이 영어를 잘하는 것은 타고난 재능 덕분이라기보다는, 한때 일부 계층에서 유행했던 조기유학을 포함해 자연스럽게 영어에 노출될 기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부모의 경제력이나 교육 수준이 높으면 이 같은 기회가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기술 활용한 격차 줄이기 노력 

영어 격차는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부족하지만 격차를 줄이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의 인공지능(AI) 혁명도  영어교육에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외국에 나가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영어를 쓸 기회를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서울시교육청도 이런 변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합니다. 초등학생들의 ‘AI 펭톡’이 대표적입니다. ‘AI 펭톡’은 인공지능을 활용한 영어 말하기 연습 시스템입니다. 학생들이 교실 안에서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언제든지 자기 수준에 맞춰 영어 말하기 연습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AI 펭톡’을 포함해 인공지능을 활용한 학생 맞춤형 교육, 그리고 외국 학생과 온라인으로 만나 실시간 쌍방향 토론을 하는 국제 공동 수업 등은 지금 서울시교육청의 역점 사업이기도 합니다. 이 같은 시도가 제대로 자리 잡으면 학생들의 영어 울렁증 해소에 큰 도움이 되리라 기대합니다.

영어 말하기 연습용 프로그램 'AI 펭톡'. [사진 교육부]

영어 말하기 연습용 프로그램 'AI 펭톡'. [사진 교육부]

영어공부 시간을 줄이기 위해 강 대표가 언급한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 사례는 인상 깊었습니다. 손 회장은 1480개 수준의 영어 단어와 간단한 문장만으로 활발한 영어 의사소통을 한다지요. 이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우리 학생들의 교육 목표와 관련해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집니다. 기후 위기와 전염병 확산 등 문명사적 변화의 한복판에서 성장하는 우리 학생들에게 수학과 과학은 입시나 취업의 수단만이 아닌 시민의 교양으로서도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지금보다 더 다양한 지식과 경험에 노출돼야 합니다. 영어만 붙잡고 있을 수 없는 만큼 초·중등교육에서 이뤄지는 영어교육의 적정 수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합니다. 영어 공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강 대표의 고민은 그래서 더욱 반갑습니다.

우리 학생들이 아주 긴 시간과 치열한 노력을 영어 공부에 쏟았음에도, 영어 울렁증에 시달리곤 했던 이유에 대해서도 강 대표가 잘 설명했습니다. 소통이 아닌 시험을 위한 공부였던 탓입니다. 대학뿐 아니라 고등학교마저 서열화한 현실에서, 시험은 변별력만 극단적으로 중요해졌습니다.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틀리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또 부끄러워합니다. 그러니까 말문이 막히고, 귀가 닫힙니다. 틀리지 않기 위한 노력은 쌓이지만, 당당하게 소통하는 힘은 자라기 어렵습니다. 점수 경쟁에 뒤처질까 두려워 입을 닫는 교실, 틀리는 게 부끄러워 말하고 쓰기를 꺼리는 교실을 바꿔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들의 영어 울렁증도 해결됩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영어 공부에 적정한 시간을 쏟고, 나머지 시간에 수학, 과학, 문학, 예술, 체육 등 다양한 소양을 쌓을 수 있습니다. 느리고 부족하지만, 이미 교실은 바뀌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빨리 더 많이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영어 무용론? 배타적 국수주의일뿐 

마지막으로 하나 덧붙입니다. 일부 진보 교육계 인사들이 토론회 등에서 영어교육 무용론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런 배타적인 국수주의는 진보가 아니라 수구적인 퇴행입니다. 서울시교육청은 외국어 교육이 지닌 가치를 강력히 지지하고 존중합니다. “영어가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들자”라는 일부의 주장은 실현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영어 등 외국어 공부는 단지 입시나 취업, 그 밖의 경제활동을 위해서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외국어 공부는 우리 학생들이 다름을 인정하고 수평적으로 소통하며 새로운 문화에 늘 열린 태도를 취하는 세계 시민으로 자라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물론, 서열화한 학교 체제에서 변별력이 극도로 강조되는 수험 경쟁을 하는 교육 현실이 학생 저마다의 수준에 맞는 외국어 학습의 걸림돌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틀리면 낙오한다는 공포 속에선 아무리 긴 시간을 들여도 외국어 실력이 늘기 어렵습니다. 이 같은 구조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정책적 노력을 하는 한편, 당장 할 수 있는 외국어 교육 사업에도 힘을 쏟아야 합니다. 서울시교육청이 외국 학생과 실시간 쌍방향 토론 수업을 하는 '국제 공동 수업' 및 '인공지능 활용 학생 맞춤형 영어 말하기 교육' 운영, 그리고 ‘전체 초등학교 대상 원어민 영어보조교사’ 등을 지원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