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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근하의 별별시각

사회적 배제 겪는 장수생, 노숙인만큼 열악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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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장수생 문제를 제기한 박한슬 작가의 글과 관련해 루터대 정근하 교수에게 관련 논문을 받아 발췌, 소개합니다. 정 교수는 드물게 공무원시험 장수생 관련 연구를 하는 학자입니다. 2015년 출간한 논문 '공무원시험 장수생들의 사회적 연계단절에 관한 연구'에서 공시 장수생들은 장기간 독서실이나, 원룸 고시원 골방에서 고립된 채 아무런 수입도 없이 생활하고 있어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를 경험하고 있으나, 그저 진로를 고민하는 취업준비생 정도로 인식되고 있어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공무원시험 준비 수험생들이 몰려 있는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 학원가의 모습. [연합뉴스]

공무원시험 준비 수험생들이 몰려 있는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 학원가의 모습. [연합뉴스]

한국사회의 장기적인 불황, 좋은 일자리 부족, 정리해고의 상시화 등으로 고등학생을 비롯한 대학생, 주부, 40대 이상의 중년 퇴직자들까지 고용이 보장되는 공무원시험에 도전함으로써 64.6대 1이라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대다수는 2년 정도 노력하면 합격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이 시험에 도전하지만 이들의 대부분이 모의고사 점수만 놓고 보면 ‘합격 가능선’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고 결국은 4~5년씩 이 시험에 매달리는 되는 것이다.

공시 장수생이 되어가는 과정은 노숙인들이 사회적 지지를 상실하게 되어 나타나는 사회적 연계단절(disaffiliation)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그리고 노숙인들이 자신과 비슷한 환경의 노숙인들과 재제휴(re-affiliation, 유유상종)를 이루어 자기 합리화를 하며 주류사회에서 이탈·고립되는 것처럼 공시생들 또한 낭인 생활이 길어질수록 주류사회의 연계가 단절되어간다. 이에 장수생들은 자신의 상황을 이해해 주는 비슷한 상황의 소수의 공시생들과 재제휴를 이루면서 심리적, 정신적 도움을 받아 다시 재도전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었다.

공시 1~2년 차는 노숙 만성화의 1단계에 해당하며 합격에 대한 욕구, 자신감, 부모님의 기대 등으로 긴장감을 갖고 공부한다. 그러나 3년째에 들어서면 자기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수치심 때문에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혼자 지내는 것이 익숙해지며 자기만의 공간에 갇혀 노숙인 적응단계에 접어든다. 그리고 4년 이상이 되면 가족관계는 물론 대인관계에 큰 문제가 발생하며 인터넷과 같은 가상의 공간에서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끼리 서로를 격려하고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하면서 소위 노숙인 만성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장애우를 비롯, 외국 이민자, 소수자 등의 동질적 연계는 이들에게 유익을 주는 중요한 기제로 작용하고 있지만, 공시 장수생들 사이에서 보이고 있는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 재제휴는 직업 선택의 다양성 측면에서 매우 편향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사이에서 얻게 된 편향된 사회적 지지, 편향된 정보는 합격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게 한다. 장수생들의 동질적인 재제휴는 수험생활을 장기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릭스비(Grigsby 외, 1990)의 연구에 의하면 노숙인이 노숙의 만성화가 되는 이유 중 하나로, 주된 관계망이 노숙인들로 이루어진 파행적 형태의 재제휴가 일반적인 사회관습과 동떨어진 노숙 문화를 만들어 내고, 노숙인들이 그 연계에 의존하게 됨으로써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어려워졌다고 보고했다. 공시 장수생 또한 자신의 상황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과의 재제휴를 통해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합격한다’라는 막연하고 편향된 지지를 받게 됨으로써 수험에 재도전하는 합리적 이유를 제공받음으로써 수험생활이 장기화하고 있었다.

이 연구는 공시 장수생들의 궤도수정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직업들 중 유난히 공시에만 집중되어 직업 선택의 다양성이 사라진 한국사회를 직시하고자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