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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가는게 꿈" 산골소녀, 95세 할머니가 돼 초등졸업장 받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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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24일 문해교육 프로그램 우등상을 받은 신광천(95)씨가 교육감 표창상을 들고 있다. 장윤서 기자

24일 문해교육 프로그램 우등상을 받은 신광천(95)씨가 교육감 표창상을 들고 있다. 장윤서 기자

10리 길을 걸어서라도 학교에 가는 중학생 오빠들이 부러웠던 강원도 산골소녀는 한 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지나서야 초등학교 졸업장을 품에 안았다. 서울 성동구에 사는 95세 신광천 씨의 이야기다. 신씨는 졸업 작품집에 “(공부를 가르쳐준) 복지관은 나의 숨터”라고 썼다.

지난 22일 신씨는 서울시교육청이 운영하는 학력인정 문해교육 프로그램 졸업식에서 교육감 표창장을 받았다. 청력과 시력이 떨어진 상황에서도 매 수업마다 10분 일찍 도착하면서 성실하게 공부해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24일 만난 그는 약속 시간보다 10분 먼저 도착해있었다.

문해교육 프로그램 우등상을 받은 신광천(95)씨가 졸업 작품집에 쓴 시. [성수종합사회복지관 제공]

문해교육 프로그램 우등상을 받은 신광천(95)씨가 졸업 작품집에 쓴 시. [성수종합사회복지관 제공]

강원도 산골소녀...90년만에 ‘초등학생’ 되다

24일 문해교육 프로그램 우등상을 받은 신광천(95)씨가 인터뷰를 하는 모습. 장윤서 기자

24일 문해교육 프로그램 우등상을 받은 신광천(95)씨가 인터뷰를 하는 모습. 장윤서 기자

1926년 강원도 홍천군에서 태어난 신씨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어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오빠들과 어린 신씨는 생계를 위해 일터로 향해야 했다. 어린 시절 꿈을 묻자 신씨는 “그런 것도 몰랐어요. 먹고 사는게 바빠 뭐 하고 싶다는 생각도 못했어요”라고 회고했다.

16세때 8살 연상의 남편에게 시집을 갔지만 결혼 생활도 잠깐이었다. 6·25 전쟁통에 남편마저 잃었다. 길쌈을 해 번 돈으로 아들을 키운 신씨는 성인이 된 아들을 따라 공장이 많은 서울에 왔다. 글을 읽을줄 모르는 신씨를 받아주는 공장이 없어 바느질과 나물 장사를 하며 돈을 벌었다. 사는게 항상 고달팠지만 “언제가 배우고자 하는 마음”만은 놓지 않았다.

10분 일찍 오고 숙제도 꼬박꼬박하는 '왕언니'

문해교육 프로그램 우등상을 받은 신광천(95)씨가 지난해 작품 발표회에서 발표하고 있다. [성수종합사회복지관 제공]

문해교육 프로그램 우등상을 받은 신광천(95)씨가 지난해 작품 발표회에서 발표하고 있다. [성수종합사회복지관 제공]

집 근처 성수종합사회복지관을 자주 들렀던 그는 어느날 ‘복지관에서 한글을 가르쳐준다’는 얘기를 들었다. 오랜 시간 가슴에 묻어뒀던 “글을 배우고 싶다”는 꿈이 생각났다. 신씨는 “신청하려고 왔더니 사람이 많아 안된다고 하더라고요. 1년을 기다렸다가 왔죠”라고 말했다. 2018년 문해교육 프로그램에 정식으로 입학한 신씨는 한번 유급을 거쳐 4년을 다녔다.

신씨를 가르친 김수열 강사는 신씨에 대해 “매일 10분 일찍 오고 숙제도 꼬박꼬박 해오는 성실한 학생”이라고 말했다. 복지관에서 30분 거리의 반지하방에 사는 신씨는 수업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출석했다. 거동이 불편해도 보행보조기를 끌고 10분 일찍 도착해 앞자리에 앉았다.

그런 신씨를 70, 80대 동생들은 “왕언니”라고 부르며 따랐다. 같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신씨의 거동을 도와 식사와 집 가는 길을 함께했다. 신씨는 “사람들이 ‘그 나이에 배워 뭐해’ 그러지”라면서도 “반 친구들이 ‘대단하다’고 칭찬을 해주니까 계속 다녔어요”라고 했다.

24일 문해교육 프로그램 우등상을 받은 신광천(95)씨와 신씨를 가르친 김수열 강사가 환하게 웃고 있다. 장윤서 기자

24일 문해교육 프로그램 우등상을 받은 신광천(95)씨와 신씨를 가르친 김수열 강사가 환하게 웃고 있다. 장윤서 기자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으로 복지관이 문을 닫으면서 어려움도 있었다. 김 강사는 학생 11명에게 한명씩 전화를 걸어 수업을 했다. 김 강사가 “어르신, 목소리가 고와서 성우나 아나운서를 했으면 좋았겠어요”라고 칭찬했다. 신씨는 “정말 그러면 좋겠네요”라고 답했다. 어린 날 꾸지 못했던 꿈을 되찾은 순간이었다.

“배우는 데는 창피 없어…안 배웠으면 한 됐을 것”

22일 오후 서울 중구 바비엥2 교육센터에서 열린 '2021학년도 초등중학 학력인정 문해교육 졸업식'에서 조희연 서울시교육감과 만 95세 최고령 만학도 신광천 어르신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뉴시스

22일 오후 서울 중구 바비엥2 교육센터에서 열린 '2021학년도 초등중학 학력인정 문해교육 졸업식'에서 조희연 서울시교육감과 만 95세 최고령 만학도 신광천 어르신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뉴시스

신씨는 “시방(時方)은 옛날 같지 않아서 세월이 좋아. 공부도 그냥 가르쳐주잖아요. 내가 다니기만 하면 되는데 너무 고맙고 감사하죠”라고 말했다. 다른 목표가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배우는 게 좋았다. 지난해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졸업장을 받았다. 2월에는 서울시교육청에서 신씨가 우수학습자로 선정되어 표창상을 받게 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22일 진행된 수여식에서 신씨는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에게 직접 표창상을 받았다. 신씨는 “생각도 못한 상을 받아 감사한데, 상장만 있고 상품이 없네”라며 웃었다.

“앞으로 공부를 계속할 거냐”는 질문에 신씨는 머뭇거렸다. “졸업장을 받으면서 중등 프로그램도 신청하겠다고 했는데, 집에 와서는 ‘아이고 내 정신’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늙어서 눈도 안보이고 귀도 잘 안 들리는데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가 될까봐…·”

김 강사는 “문해교육은 어르신들에겐 단순히 글을 배우는게 아니라 잃어버린 자신감을 찾는 과정”이라고 했다. 신씨는 “배우지 않았다면 마지막까지 한이 됐을 거예요. 배우는 데는 창피한 게 없어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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