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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플] “넵 알겠습니다” 막내 너구리들의 반란…엔씨의 ‘탈린저씨’ 도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넵! 알겠습니다.

일단 대답은 했다. 하지만 뒤돌아서니 땀이 삐질삐질 흐른다. 신입이라면 한번쯤 해봤을 그 생각. ‘…모르겄는디.’

출시 직후 3000장이 완판된 도구리 '넵' 티셔츠. 6차 재입고까지 진행됐다. 현재 품절. 사진 엔씨소프트

출시 직후 3000장이 완판된 도구리 '넵' 티셔츠. 6차 재입고까지 진행됐다. 현재 품절. 사진 엔씨소프트

엔씨소프트가 지난해 선보인 ‘도구리’의 캐릭터 스토리 중 하나다. 땡그란 눈이 매력인 이 분홍 너구리는 MZ세대 직장인 사이에서 인스타툰 등으로 공감을 사며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도구리 지식재산(IP)을 활용한 직장인 생존유형 테스트는 400만명이 참여했고, 막내끼리 애환을 나누는 공간 ‘막내클럽(막피아)’엔 30만명이 다녀갔다.

최근 엔씨는 ‘탈(脫)게임’ 사업으로 분주하다. 음악(피버), 웹툰(버프툰), 인공지능 야구 앱(페이지), K팝 팬덤 플랫폼(유니버스) 등 게임이 아닌, IP 사업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상당수가 MZ세대 사용자를 겨냥했다. 새로운 IP를 키우거나, 리니지같은 기존 IP를 새로운 콘텐트에 접목하는 방식. ‘린저씨(리니지를 즐기는 중년 남성 사용자)’ 중심인 사업 포트폴리오에 새 바람을 불어넣기 위해서다. 도구리는 이 흐름을 잇는 캐릭터사업부의 첫 작품이다.

하찮을수록 귀한 도구리 유니버스

엔씨소프트 심보영 캐릭터사업부 CP가 7일 판교 엔씨 본사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도구리 탈을 쓰고 있는 건 최근 신입 공채로 입사한 캐릭터사업부 직원. 심 CP는 "지금은 탈을 쓰지만, 이 친구와 도구리의 5년, 10년 뒤는 제 5년, 10년 뒤보다 훨씬 성장 가능성이 크고 멋질 거"라고 말했다. 우상조 기자

엔씨소프트 심보영 캐릭터사업부 CP가 7일 판교 엔씨 본사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도구리 탈을 쓰고 있는 건 최근 신입 공채로 입사한 캐릭터사업부 직원. 심 CP는 "지금은 탈을 쓰지만, 이 친구와 도구리의 5년, 10년 뒤는 제 5년, 10년 뒤보다 훨씬 성장 가능성이 크고 멋질 거"라고 말했다. 우상조 기자

엔씨가 도구리에 담은 바람은 무엇일까. 지난 7일 경기도 성남시 판교테크노밸리 내 엔씨소프트 사옥에서 심보영(43) 캐릭터사업부 총괄 프로듀서(CP)를 만났다. 2003년 중등 영어교사로 직장생활을 시작한 심 CP는 “적성에 세상 안 맞았던 공무원 대신 마케터의 꿈을 쫓아 이력서만 200군데 이상 넣었다”고 했다. 존슨앤존슨 미국 본사,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 엔씨다이노스 등을 거쳐 지난 2019년 엔씨에 합류했다.

도구리는 어떻게 탄생했나. 
“게임 IP를 게임 밖으로 확장하는 차원에서 회사가 2년 전 캐릭터사업부를 만들었다. 어느 게임의 어떤 캐릭터를 재가공할지 연일 아이디어 회의를 했다. 최종 아이디어는 사내 게시판에서 얻었는데, ‘리니지 2M에 도둑 너구리 귀엽다’는 내용이었다. 도둑 너구리는 (게임에서) 실력 낮은 저레벨 유저들에게만 보이고, 나뭇조각이나 천 쪼가리 같은 걸 툭툭 던지는 친구다. 하찮은데 귀여운 캐릭터, 이거다 싶었다. 시안 수백 개를 검토하고 지난해 지금의 도구리를 출시했다.”
리니지 2M의 도둑 너구리(왼쪽)와 이를 귀여운 캐릭터로 다듬은 도구리. 사진 엔씨소프트

리니지 2M의 도둑 너구리(왼쪽)와 이를 귀여운 캐릭터로 다듬은 도구리. 사진 엔씨소프트

사회 초년생 콘셉트인 이유가 있나.
“처음엔 콘셉트가 없었다. 외형만 다듬어 6개월 만에 휘리릭 출시했는데, 캐릭터는 공감을 살 수 있는 스토리와 친근함이 중요하더라. (도둑 너구리가) 하찮은 물건들을 소중히 주워담는 모습이 뭔가…. 스티커나 마스킹테이프를 모아 꾸미기 좋아하는 요즘 세대와 닮아보였고, 지금은 저레벨이지만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점에서 신입사원 콘셉트로 가게 됐다.”
도구리 SNS에 올라와있는 각종 '짤툰'들. 사진 도구리 인스타그램

도구리 SNS에 올라와있는 각종 '짤툰'들. 사진 도구리 인스타그램

리니지를 굳이 MZ세대 타깃으로 재가공할 필요가 있나.
“리니지는 1998년에 나온 IP다. 게임을 안 하거나 젊으면 리니지를 모른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 다른 채널로 소통해야 한다. 도구리도 젊은 직원들 아이디어만 반영해서 만든 캐릭터다. 우리 팀에선 ‘나이 든 사람은 아이디어 내지 말라’는 회의 원칙도 있다.”

“나이 든 사람은 아이디어 내지 말자”

원칙이 흥미롭다.
“(상위 조직인) 캐릭터 프로덕션실에 나보다 경력이 오래된 실장님이 ‘나이 든 사람이 강하게 의견을 내면 모든 게 틀어진다’면서 세운 원칙이다. 우리 팀 아이디어 회의는 26~29세 직원 대여섯 명이 전담한다. 실행을 돕는 게 선배들 몫이다. 전략은 경험이 필요한 부분이니까. 아이디어는 바텀업(bottom-up), 전략은 탑다운(top-down). 이게 팀의 모토다.”
20대만 아이디어를 낼 수 있나.
“30대 초반까지도 가능하다. 캐릭터 사업의 핵심 소비자는 1030 세대이기 때문에 젊은 직원들의 의견이 중요하다. 나도 마케터인지라 습관처럼 아이디어를 내려할 때가 있는데 자중하려고 노력한다. 실제로 나 같은 ‘고인물’은 생각 못하는,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많이 나온다.” 
엔씨소프트 심보영 캐릭터사업부 CP가 7일 판교 엔씨본사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 우상조 기자

엔씨소프트 심보영 캐릭터사업부 CP가 7일 판교 엔씨본사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 우상조 기자

예를 들어, 어떤?
“콘셉트부터 마케팅 채널 섭외까지 전부 우리 애들(젊은 직원들) 건데…. 하나만 꼽자면 ‘막피아’다. 도구리 프로젝트 중 가장 성공했다. 막피아엔 고해성사 코너가 있는데 회사 막내들이 실수담을 공유하는 곳이다. 처음 콘셉트는 ‘실수를 위로해주자’였다. 그런데 젊은 직원들이 ‘저흰 위로받고 싶지 않아요. 위로는 꼰대 같아요. 실수한 거 속 시원히 털고 가는 걸로 충분해요’ 라더라. 자기들끼리 실수를 공유하고 웃어넘기면서 더 큰 힐링을 받는 것 같았다. 도구리 색깔을 정할 때도 비슷했다.”
30만명 이상의 막내들이 방문한 도구리 막내클럽. 사진 엔씨소프트

30만명 이상의 막내들이 방문한 도구리 막내클럽. 사진 엔씨소프트

색깔은 왜?
“나는 처음에 분홍색을 반대했다. ‘너구리색이 아니라, 분홍 소시지 색이잖아’ 했는데 바로 분홍 소시지가 콘셉트라는 거다. 너무 세련된 색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호감 색도 아니지만 굉장히 만만하고 하찮아 보인다면서(웃음). 젊은 직원들이 다 좋아하길래 이걸로 했다.”

24년전 캐릭터에 새 옷을

엔씨는 최근 캐릭터 하우스 ‘스튜디오 644’도 만들었다. 20여 년간 쌓아온 엔씨 IP와 향후 출시될 캐릭터들을 하나로 모으는 브랜드다. 644는 엔씨 본사가 위치한 도로명주소에서 따왔다. 스튜디오 644는 도구리를 시작으로 여러 엔씨 IP를 가공하고 있다.

‘어메니티 라운지’는 어떤 프로젝트인가.
“캐릭터를 완전히 새롭게 재해석한 도구리와 달리, 엔씨 게임의 세계관은 건드리지 않고 캐릭터의 외형만 바꾸는 콜라보(협업) 프로젝트다.”
1998년 출시된 ‘리니지’ 인기 캐릭터 3종(데포로쥬, 다크엘프, 데스나이트)(왼쪽)과 이를 2021년 재해석한 일러스트레이터 ‘배즈본(최형내 작가)’의 디자인. 사진 엔씨소프트

1998년 출시된 ‘리니지’ 인기 캐릭터 3종(데포로쥬, 다크엘프, 데스나이트)(왼쪽)과 이를 2021년 재해석한 일러스트레이터 ‘배즈본(최형내 작가)’의 디자인. 사진 엔씨소프트

외부의 시선으로 엔씨 IP를 재해석하는 건가.
“그렇다. 지난해 리니지 메인 캐릭터 셋을 인기 일러스트레이터 ‘배즈본(최형내 작가)’이 스트릿 스타일로 디자인하고, MZ세대 인기 의류 브랜드 꼼파뇨와 협업해 무신사에서 한정 판매하는 프로젝트를 했다. 다른 단발성 시도도 많이 해볼 예정이다.”

“카카오 부럽지만 엔씨 IP만의 저력 커”

결국 카카오프렌즈 같은 국민 캐릭터를 만들고 싶은 건지?
“국민 캐릭터는 만들고 싶다고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웃음). 나도 초반엔 카카오나 라인이 경쟁사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과거의 내가 창피하다. 서로 장단점이 다른 법인데.”
어떻게 다른가. 
“카카오·라인은 메신저라는 강력한 플랫폼을 통해 캐릭터를 대중적으로 만들 수 있다. 이 회사들이 무료로 활용할 수 있는 각종 플랫폼과 서비스가 엔씨에겐 다 (유통) 비용이다. 하지만 IP쪽에선 엔씨의 자산이 크다. 우리 게임에 괜찮은 캐릭터가 정말 많다. 성격 재해석, 외형 재해석 등 여러모로 시도해볼 여지가 있다. 카카오는 처음부터 캐릭터를 다 창작해야 하지 않나. 우리가 가지지 않은 건 부럽지만, 남들과 다르니까 재밌는 거다.”
엔씨소프트 심보영 캐릭터사업부 CP가 7일 판교 엔씨 본사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 우상조 기자

엔씨소프트 심보영 캐릭터사업부 CP가 7일 판교 엔씨 본사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 우상조 기자

최종적으로 어떤 캐릭터를 만들고 싶나.
"모든 사람이 아는 캐릭터가 꼭 좋은 캐릭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두가 알면 무난한 느낌이지 않나. 50대 아저씨들은 몰라도 10대 친구들이 좋아하는, 기억에 남는 스토리를 갖고 실생활에 종종 보이는, MZ세대가 사랑하고 친근하게 느끼는 캐릭터를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