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년간 18만부 대박…회사 다니며 쓴 동화책이 어른들 울렸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쓸 당시에는, 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읽힐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작가가 된다는 생각은 사치였고, 이렇게 살다 보면 이야기 잘하는 할머니라도 되겠지, 라는 마음으로 썼으니까요."

'어른이 감동하는 동화'로 호평 #출간 1년만에 약 18만부 팔려 #마지막 수컷북부흰코뿔소 모델 #서로 다른 존재들의 연대 그려 #이야기 구상 때 아버지 암판정 #"국밥 한 그릇 같은 책"쓰라셨죠 #

『긴긴밤』의 작가 루리의 말이다. 코뿔소 '노든'과 이름 없는 펭귄 등의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펼친 이 동화책은 지난해 2월 출간 직후부터 감동을 받았다는 어른 독자들의 호평과 함께 1년 만에 18만부 가까이 팔렸다.

'긴긴밤'의 작가 루리. [사진 루리]

'긴긴밤'의 작가 루리. [사진 루리]

루리는 공모전을 통해 발굴된 신인.『긴긴밤』은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을, 앞서 실직한 동물들과 도둑들의 이야기를 담은 2020년 첫 그림책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는 황금도깨비상을 받았다.

 서면 인터뷰에서 그는 "당선 전화를 받았을 때 주저앉아서 울었다"고, "많은 분들이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신 것이 너무 감사하고 부끄럽다"고 했다. 직장인인 그는 "제가 쓴 이야기가 '저'라는 사람에 대한 정보에 가려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실명 등은 공개하지 않았다.

-『긴긴밤』의 작가로서, 코뿔소 노든에게 참혹한 비극을 거듭 안겨줬는데.

"노든은 마지막 남은 수컷 북부흰코뿔소 수단을 모델로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존재가 겪을 고통을 제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이었으리라고, 어쩌면 『긴긴밤』의 이야기보다 더한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2018년 전 세계에 뉴스로 전해진 수단의 죽음은 이야기의 단초가 됐다. 작가는 "처음에는 그림책으로 구상하다가, 점점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져 글로 쓰게 됐다"며 "글이 당선된 다음에 본격적으로 그림 작업을 한 것"이라고 했다.

'긴긴밤'에 수록된 그림. [사진 문학동네]

'긴긴밤'에 수록된 그림. [사진 문학동네]

완성된 이야기는 노든이 비극과 악몽으로 긴긴밤을 지새면서도 삶을 이어가는 모습이, 특히 자신과 전혀 다른 존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소중한 관계를 맺는 모습이 뭉클하다. 그 원동력을 묻자, 작가는 이야기를 쓰기 전에 우연히 본 '폭탄연못' 얘기를 꺼냈다. "베트남 전쟁 중 약 10년간 미군이 270만 톤이 넘는 폭탄을 투하했는데, 그 폭탄이 떨어진 자리에 약 45년 정도가 흐른 후의 모습"을 담은 캄보디아 작가 반디 라티나의 사진작품이다.

 "여기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었을 것 같아요. 먼저, 폭격이라는 엄청난 시련의 이야기가 있었겠죠. 그리고 불모지가 된 이 구덩이에 빗물이 고이기 시작했을지도 몰라요. 덕분에 갈 곳 없이 떠다니던 씨앗이 이곳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죠. 홀로 그곳을 외롭게, 하지만 꿋꿋하게 지켜오다가,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45년이라는 시간을 지나 사진 속 모습을 가지게 되었을 거예요. 폭격이 남긴 웅덩이는 메꿔지지 않을 겁니다. 영원히 남는 흉터가 되겠죠. 하지만 무언가가 이 웅덩이에서 살아남았고, 그것들의 이야기를 이어나갔습니다. "

서로의 '이야기'가 삶의 원동력

 그는 "그걸 본 작가가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을 본 제가 『긴긴밤』이라는 이야기를 썼다. 그리고『긴긴밤』을 읽은 누군가가 또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낼지 모른다"며 『긴긴밤』을 "비극 속에서도 계속 이어지고 이어지는 이야기이고, 서로의 이야기가 서로의 삶의 원동력이 되는 이야기"라고 했다.

-작품의 화자인 어린 펭귄은 다른 코뿔소·펭귄과 달리 이름이 없는데.

"지금은 무지개다리를 건넜지만,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온 멍멍이 뭉크가 있습니다. 뭉크가 나오는 악몽을 가끔 꾸는데 뭉크랑 똑같이 생긴 멍멍이들이 수백 마리 있는 곳에서 뭉크를 찾아 탈출해야 하는 꿈이에요. '뭉크야!' 하고 불러도 소용이 없어요. 뭉크는 원래 부른다고 오는 친구가 아니었거든요. 저만 아는 특징들, 미역국 냄새와 엉덩이에 난 작은 사마귀와 게슴츠레한 눈빛 같은 것들로 뭉크를 찾아요....아기 펭귄은 뭉크처럼 사랑받는 존재였고, 그래서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습니다."

'긴긴밤'에 수록된 그림. [사진 문학동네]

'긴긴밤'에 수록된 그림. [사진 문학동네]

-어린 펭귄은 어머니 대신 아버지가 여럿입니다. 탄생 전부터 그를 돌본 펭귄 '치쿠'와 '윔보', 그리고 '노든'까지 모두 수컷인데.
"이야기를 구상할 무렵 아빠가 암 판정을 받으셨습니다. 마음의 정리를 하고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아빠를 보면서,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 같아요. 아빠는 씩씩하게 싸워서 『긴긴밤』 시상식까지 참석하셨고, 저 대신 수상 소감도 한마디 하셨어요. 요즘 책값이 설렁탕 한 그릇 가격이랑 비슷한 것 같은데, 앞으로도 사람들한테 국밥 한 그릇 같은 책을 쓰라고 하셨습니다. "

질문에 없었지만, 작가는 자신의 '긴긴밤'을 이렇게 전했다. "뭉크가 죽고, 아빠가 아프고, 힘든 일들은 한꺼번에 몰려왔어요. 그때 들었던 생각이, 일주일 중 30초만, 그 정도만 행복하면 살자, 라는 생각이었어요. " 그가 "긴긴밤 속을 허우적거리다가도, 저도 모르게 아, 내가 이것 때문에 그 시간들을 견디고 살아냈구나, 하는 순간들"은 이랬다. "키우던 강아지가 자기 방귀 소리에 놀라거나, 동생이 머리를 망쳐서 웃긴 얼굴로 온다거나, 30초 정도 웃음이 터지는 그런 하찮은 순간들이 저를 살게 하더라고요."

'긴긴밤'에 수록된 그림. [사진 문학동네]

'긴긴밤'에 수록된 그림. [사진 문학동네]

-미술이론 전공인데, 그림책에 매료된 계기는.

"그냥 쓰고 그리고 사부작거리는 게 너무 좋았어요. 학교에서도, 회사에 다니면서도, 힘든 일이 있으면 이야기 속으로 도망을 쳤던 것 같아요."

-좋아하거나 영향받은 작품은.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웨스 앤더슨 감독의 ‘개들의 섬', 그리고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 시리즈와 '도리를 찾아서' 를 좋아하고, 여러 번 보면서, 나도 저런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업작가가 될 생각을 묻자, "직장생활을 그만두지는 않을 것 같다"고 했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힘든 날도 있고 지치는 날도 있지만, 그래도 출퇴근길에 마주치는 사람들, 일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제가 앞으로도 종이에 담아내고 싶은 모습들이라서요. 그런 모습들을 담아, 지금은 '파우스트'를 기반으로 한 그림책을 작업 중에 있고, 집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동화도 구상 중입니다."

루리 작가에게 독자들의 반응을 찾아보는 지 물었다. 그는 "매일 독자분들의 리뷰를 찾아보는 재미에 취해서 살고 있다"고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리뷰는 남편분이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를 읽고 계신 사진으로 시작하는 글이었습니다. 아내분이 쓰신 건데, 제 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두분이 어떻게 살아오셨는지를 담담하게 써 내려간 글이었어요. 두분이 어떻게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고 살아오셨는지를요. 그렇게 살다가, 남편분께 병이 생겼는데 그걸 숨기고 직장생활을 해오다가, 용기를 내서 아내분께 얘기를 했고,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치료를 하면서, 한 가족이 어떻게 긴긴밤을 보내왔는지를 쓰셨어요. 다행히 지금은 남편분도 회복하시고 새로운 직장에 취직을 하셔서 다시 또 씩씩하게 살고 있다는 얘기를 하시면서 마지막에, 우리가족은 함께 긴긴밤을 견뎌왔으니 더이상 브레멘에 갈 필요가 없다, 고 쓰셨더라고요. 결국 ‘긴긴밤’을 완성하는 건 독자분들의 삶의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