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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정호의 시시각각

임기 말 '문재인 외교'가 가야 할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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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지난해 12월 29일 기자간담회에서 종전선언 문안과 관련, 한미간에 ″이미 사실상 합의가 돼 있는 상태″라고 밝혔다. 정 장관은 이어 같은달 11~12일(현지시간) 영국 리버풀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외교개발장관 회의에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과 만나 이같은 사실을 재확인했다고 덧붙였다. [연합뉴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지난해 12월 29일 기자간담회에서 종전선언 문안과 관련, 한미간에 ″이미 사실상 합의가 돼 있는 상태″라고 밝혔다. 정 장관은 이어 같은달 11~12일(현지시간) 영국 리버풀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외교개발장관 회의에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과 만나 이같은 사실을 재확인했다고 덧붙였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은 고집이 세다고 한다. 문 대통령의 복심(腹心)이라는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마저 이렇게 얘기했다. "문 대통령이 노 대통령보다 고집이 훨씬 세다”고. 그러면서 "문 대통령은 겉으론 섬세하고 여린 분 같은데 속은 훨씬 더 강하고 단단한 분”이라고 덧붙였다.

"미국과 종전선언 문안 의견 일치" #우크라이나·중국 몰두 미국과 괴리 #'고집외교' 아닌 '가치동맹' 승화해야

탈원전 정책만큼 그의 고집이 느껴지는 분야가 외교·안보다. 임기 종료를 석 달 앞두고 외교 전반에 대한 문 대통령의 생각이 최근 드러났다. 국내외 8개 통신사와의 합동 서면 인터뷰에서다. 여기서 그는 물 건너간 종전선언의 유용성과 현실 가능성을 여전히 강조했다. "종전선언은 적대 관계 종식과 상호 신뢰를 증진시키고 비핵화와 평화의 제도화로 나가는 과정으로 유용성이 있다"고. 그는 미국이 진심으로 종전선언을 원한다고 믿는 것 같다. "지금 한·미 간에는 북한에 제시할 종전선언 문안까지 의견 일치를 이룬 상태"라고 밝힌 게 그 증거다. 그리하여 문 대통령은 "종전선언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더욱 성숙시켜 다음 정부에 넘겨주고 싶다"고도 했다.
과연 그럴까. 워싱턴 사정에 밝은 전문가들은 "현재 바이든 행정부는 대북 문제, 특히 종전선언 추진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고 단언한다. "눈앞에 닥친 우크라이나 사태에다 중국과의 갈등, 그리고 이란 핵 협상 문제에 미 외교력이 총동원된 상태"라는 것이다. "한국 측에서 계속 종전선언 추진을 조르는 탓에 마지못해 문구 조율을 해줄 수는 있지만, 북한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 한 미국은 할 생각이 없다"고 이들은 장담했다. 이런 상황에서 종전선언이 될 리가 없다.
그럼에도 문 대통령은 잘만 하면 종전선언이 이뤄질 것으로 착각하는 듯하다. 여기에는 참모들의 그릇된 보고와 조언이 한몫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지난해 12월 말 기자회견을 열어 "한·미 간에 종전선언의 중요성에 대해 공감하고 있다”며 "사실상 (문안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미국이 종전선언에 적극적인 것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권 초, 청와대 고위 관계자를 만나 평소에 궁금했던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누가 외교정책을 결정하냐"고. 남북 문제 및 안보 사안에 낯선 강경화 당시 장관이 외교부를 이끌고 청와대에도 이 분야에 정통한 인물이 잘 안 보였던 탓이었다. 이 때문에 시중에는 "청와대에 입성한 586 참모들이 내부 회의를 열어 외교를 좌우하는 것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 관계자의 답은 참으로 의외였다. "문 대통령 본인이 직접 외교를 지휘한다"고. "문 대통령이 노무현 정권 시절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터라 소소한 외교·통일 문제까지 꿰고 있어 참모들이 못 당한다"며 웃었다. 그 말을 들은 당시에는 문 대통령을 띄워주기 위한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근 5년을 지내고 보니 그 이야기가 진실이었다는 확신이 든다. 정부 안팎의 외교 전문가들 조언을 경청했다면 지금 같은 '고집 외교'가 계속될 리 없다.
남은 임기 석 달은 길다면 긴 시간이다. 그럼 뭘 해야 하나. 미 언론이 이례적으로 문 대통령의 발언에 큰 관심을 둔 적이 있다. 지난해 5월 한·미 정상회담차 미국에 가 조 바이든 대통령과 '글로벌 백신 파트너십'을 맺었을 때다. 미 언론들은 한국이 미국과 손잡고 코로나 퇴치에 노력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신선하게 봤다는 것이다. 이렇듯 한국이 북핵뿐 아니라 세계적 난제 해결에 도움을 주는 든든한 파트너란 믿음을 심어주면 한·미 관계는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다. 한·미 관계를 안보동맹에서 숭고한 공통 목표를 추구하는 가치동맹으로 승화시키자는 얘기다. 코로나뿐 아니다. 찾아보면 같이 할 일이 많다. 요즘 제일 핫(hot)하다는 한국이다. 기후변화, 빈곤 및 인권 문제 해결 등 우방들과 손잡고 활약할 분야는 많다. 그게 바로 남은 석 달, 문재인 외교가 가야 할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