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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의 시시각각

기생수 vs 기생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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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서울 서초구 센트럴시티에 설치된 넷플릭스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 팝업존을 찾은 시민들. [연합뉴스]

서울 서초구 센트럴시티에 설치된 넷플릭스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 팝업존을 찾은 시민들. [연합뉴스]

“재수 없어, 기생수 새끼.” 티격태격 다투던 여학생이 상대방 남학생에게 한 욕설이다. 기생수? 그 말을 몰랐던 선생님이 묻는다. “기생수가 뭔데?” 또 다른 남학생이 일곱 자로 대답한다. “기초생활수급자.” 선생님은 여학생에게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마”라고 꾸짖는다.

가난마저 혐오대상이 된 사회
차별과 폭력이란 악취 만들어
좀비정치 언제까지 봐야 하나

 요즘 글로벌 흥행 중인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의 한 장면이다. 기자도 ‘기생수’라는 줄임말을 처음 들었다. 혹시 ‘기생충’이 아닌가 싶었다. 가난마저 혐오 대상이 된 교실 풍경이 씁쓸하기만 하다. 1997년 외환위기로 폭증한 빈곤층을 돕기 위해 2000년 도입된 기초생활수급자는 소득이 최저생계비에 미치는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소문난 대로 ‘지금 우리 학교는’은 고교 폭력을 소재 삼아 우리 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풍자한 좀비 드라마다. 쫓고 쫓기는 좀비와의 사투가 12부작 내내 펼쳐진다. 교실·식당·도서관·운동장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쉴 새 없이 전개되는 추격전에 때론 물릴 정도지만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의 끔찍한 형상이 코로나19 팬데믹과 맞물리며 폭발적 흥행세를 이어가고 있다.
 ‘지금 우리 학교는’은 장르상 2016년 1157만 관객을 기록한 영화 ‘부산행’을 이어받았다. 드라마에서도 아주 짧게나마 ‘부산행’이 인용된다. 최근 우리 대중문화의 핵심 코드로 떠오른 좀비의 결정판쯤 될까. 관절이란 관절은 다 꺾으며 질주하는 K좀비는 ‘13인의 (무서운)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오’라는 이상의 시 ‘오감도(烏瞰圖)’마저 연상시킨다. 질시와 차별의 공간으로 전락한 학교 자체가 ‘좀비 공장’을 닮았다.
 ‘지금 우리 학교는’을 보며 영화 ‘기생충’을 떠올렸다. 두 작품 모두 냄새가 핵심 요소 중 하나다. 드라마에선 ‘시체 썩는 냄새’가, 영화에선 ‘반지하 냄새’가 퍼지고 퍼진다. 드라마의 원작인 웹툰도 냄새로 시작한다. 분노 바이러스를 처음 만든 과학교사에게서 풍기는 ‘못 참을 것 같은 냄새’가 학생에게, 시민에게 옮겨 간다.
 두 작품에서 냄새는 치명적이다. 폭력은 물론 살인까지 부른다. 우리 사회, 나아가 지구촌에 만연한 불공정과 빈부격차를 은유하고 있다. 한국적 특수성이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한 모양새다. 사회 비판이란 주제를 잘 빚은 얘기에 담아내는 K콘텐트의 힘이다. ‘오징어 게임’의 성공 요인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에서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 변신한 한국 대중예술의 약진이 반갑다.
 특히 좀비라는 다분히 서구적 모티브를 맛나게 조리하는 우리 젊은 숙수(熟手)들의 솜씨가 놀랍다. 시간과 장소의 경계가 사라진 초연결 세상에서 더욱 풍성한 상상력을 발휘하길 기대한다. ‘지금 우리 학교는’의 이재규 감독도 “‘오징어 게임’이 (글로벌 시장의) 창문을 열었다면 좋은 콘텐트가 계속 그 창문으로 배달돼야 한다”고 희망했다.
 반면에 다소 허전한 마음도 지울 수 없다. 좀비를 양산하는 우리 사회의 불편한 자화상 때문이다. 더욱이 후보 등록이 본격화한 대선판의 ‘너 죽고 나 살자’는 네거티브 공방이 볼썽사납다. 기차·학교를 넘어 청와대·여의도를 다룬 좀비영화가 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는 소통에는 담을 쌓고 상대를 물어뜯으려고만 하는 한국 정치판을 ‘좀비 정치’라고 못 박았다.
 좀비는 집단주의·획일주의의 등가물이다. 자기 판단 없이 남들만 따라가는 무리다. 특히 드라마 속의 좀비들은 소리에 민감하다. 소리 나는 곳을 따라 우르르 몰려다닌다. 자기 진영 목소리만 확성기처럼 틀어대고, 똑같은 소리만 반복하는 정치권과 다름없다. ‘지금 우리 학교는’에는 별종 좀비도 등장한다. 바이러스에 감염돼도 다른 친구들을 물어뜯지 않는다. 시리즈2에 대한 복선쯤 될까. 정치권에도 그런 별종이 많아져야 한다. 그래야 정치판에 짙게 깔린 악취도 조금씩 줄어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