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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객전도 여행사 차려 3년만에 '별' 달다…퇴직 공무원 반란 [추기자의 속엣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추기자의 속엣팅

한 사람의 소개로 만나 속엣말을 들어봅니다. 그 인연을 통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요. 인연 따라 무작정 만나보는 예측불허 릴레이 인터뷰를 이어갑니다.

추기자의 속엣팅

추기자의 속엣팅

 [프롤로그] 정석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지난 2020년 경남 하동군의 ‘섬진강 달마중’에 참여한 뒤 “여기서 꼭 한 달을 살아봐야겠다”고 결심하고 ‘지방 한 달 살이’에 나섰습니다. 이 여행 프로그램을 기획한 ‘놀루와’는 조문환 대표가 공무원 정년 7년을 남기고 퇴직해 창업한 사회적 기업입니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하는 ‘2021 한국관광의 별’에도 올랐죠. “부담스럽다”며 인터뷰를 고사하던 조 대표가 정 교수의 설득 끝에 속엣팅에 나섰습니다.

하동→목포→전주→강릉…서울 교수의 지방 한달살이 속사정 [추기자의 속엣팅]

조문환 대표. 공무원 정년을 7년 남기고 그만둔 뒤 주민공정여행 '놀루와'를 창업했다. 3년이 갓 지난 이 업체는 최근 '20201 한국관광의 별'에 선정됐다. [사진 조문환]

조문환 대표. 공무원 정년을 7년 남기고 그만둔 뒤 주민공정여행 '놀루와'를 창업했다. 3년이 갓 지난 이 업체는 최근 '20201 한국관광의 별'에 선정됐다. [사진 조문환]

시골 공무원이 있었다. 그대로만 있으면 몇 년 후 은퇴해 안정적이고 편안한 노후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정년을 7년 남기고 돌연 사표를 냈다. 그것도 ‘돈 안 되는’ 여행 사업을 하겠다면서다. “건강한 공동체를 위하는 일을 해 보고 싶다”면서 시작한 일은 주민여행사였다. 자비를 들여 초대한 다문화가정 주민 40명이 첫 고객이었다. 창업 후 2년도 안 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터졌다. 손님이 1명이든, 2명이든 대표 여행 상품인 ‘섬진강 달마중’은 계속 이어갔다.

이 사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무모한’ 도전에 나선 걸까. 경남 하동군의 주민공정여행 ‘놀루와’의 조문환(59) 대표를 지난달 20일 전화로 연결해 속내를 들어봤다. “50대가 되니까 후회 없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예. 누군가가 정해 놓은 길이 아닌 내가 스스로 길을 만들어 걸어봐야겠다는, 일종의 제 자신을 향한 도전이었지예.”

면장님에서 여행사 대표로

‘달마중’은 조문환 대표가 추구하는 완벽한 미를 섬진강 백사장에서 실현한 프로그램이다. 매월 보름이 있는 토요일에 하동평사리 백사장에서 열린다. [사진 조문환]

‘달마중’은 조문환 대표가 추구하는 완벽한 미를 섬진강 백사장에서 실현한 프로그램이다. 매월 보름이 있는 토요일에 하동 평사리 백사장에서 열린다.[사진 조문환]
겨울철 놀이문화를 여행으로 승화시킨 논두렁 축구대회. [사진 조문환]
'슬로워크'는 평사리 황금들판과 하동녹차를 테마로 열린다. 조문환 대표는 공무원 시절 하동군 슬로시티 인증 업무를 담당했었다. [사진 조문환]

조 대표는 지난 2017년 6월 하동군 악양면장을 마지막으로 28년간의 공무원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1년여 만인 2018년 8월 친구들과 함께 협동조합 놀루와를 출범시켰다. 그는 “어느 지자체나 살기 위해선 여행자가 많이 와야 하지만, 여행자를 위한 여행이 아니라 주민을 위한 여행업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놀루와의 목표는 여행자 유치가 아닌, 지역 주민의 지속가능한 삶”이라면서다. 주객이 바뀐 여행사인 셈이다.

‘달마중’ 여행객은 섬진강변 백사장에서 호롱불을 든 채 달을 보고, 담요를 펼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지역 예술인의 연주를 감상한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배경이기도 한 악양면 평사리 들판 6㎞를 걸으며 차(茶)와 버스킹을 즐기는 ‘평사리 슬로워크’와 이곳이 텅 비는 겨울에 펼치는 ‘논두렁 축구대회’는 놀루와가 기획한 대표적인 문화 행사다. 불과 4년 남짓한 이 신생 기업은 최근 ‘2021 한국관광의 별’에 선정됐다. 지난해 신설된 지속가능성 부문 특별상 1호다.

가족의 반대는 없었을까. 사실 그의 조기퇴직 공모자는 아내다. 간호사였던 아내 역시 하동군 공무원이다. 그는 “퇴직 2년 전부터 아내와 진로를 같이 고민했다”며 “빨리 퇴직할 수 있었던 것도 아내 덕분”이라고 했다. 뮤지션인 아들들도 든든한 지원군이다. 기타리스트인 큰아들 예찬(31) 씨는 놀루와가 지난 2019년부터 진행하는 화사별서 고택음악회에 참여했고, JTBC ‘슈퍼밴드2’에서 인기를 끈 ‘더웨일즈’의 드러머 기훈(26) 씨도 조만간 연주에 나설 예정이다.

6년간 매주 쓴 하동편지, 2000명으로  

조 대표가 처음부터 시골 지킴이를 자처한 건 아니었다. 서울 대기업에 취직한 친구들을 부러워한 적도 있다. 그 역시 서울에서 잠시 회사에 다녔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건 ‘두 번의 한파’였다”고 했다. 그 첫 번째가 2004년 화개면사무소 근무 때다. 마을 출장을 갔다가 컨테이너 하우스에서 한겨울을 견디던 노부부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막연하게나마 “시골 공무원이라면 농촌을 제대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우연히 삼성경제연구소(SERI)의 농촌관광대학 모집 공고를 보고 ‘할렐루야’를 외치며 단숨에 등록했다. 1년간 주말마다 하동에서 수원까지 통학하며 ‘농촌 관광’을 공부했다.

섬진강은 조문환대표를 키운 8할이다. 지금까지 40회 넘게 섬진강 발원지를 답사했다. [사진 조문환]

조문환 대표는 인생여행 중이다. 2017년 괴테따라 이탈리아 여행을, 2019년 연암따라 중국여행을 다녀왔다. 〈괴테따라 이탈리아 로마 인문기행〉을 발간했다. 이탈리아 여행 중 비에스떼에서. [사진 조문환]
놀루와는 여행약자들을 위한 ‘트레블 헬퍼’를 운영한다. 노약자, 다문화가족, 청소년과 장애인 등이 주 고객이다. 드레스와 교복 사진촬영은 이들에게 특별한 체험이자 즐거움이다. [사진 조문환]
어르신을 대상으로 하는 자서전 교실. 2019년부터 매년 진행해 지금까지 4기, 50여 명이 수료했다. 조문환 대표가 태어나서 가장 잘 한 것 10가지 중에 하나로 꼽는 일이다. [사진 조문환]

2011년 찾아온 또 다른 한파는 그의 열정에 다시 불을 지폈다. 아무리 추워도 얼지 않던 섬진강이 얼어붙었고 하동의 상징인 차(茶)도 얼어 죽었다. 구제역 파동까지 겹치면서 공무원 선배 2명이 방제 작업 중 과로로 순직했다. “도시 사람들에게 농촌의 어려움을 알리고 응원을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농촌관광대학에서 알게 된 전문가들에게 보내는 ‘하동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6년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토요일엔 하동 전역을 취재하고 일요일 밤 e메일을 보냈다. 그 사이 300명이던 구독자 수는 2000명으로 늘었다.

그는 최근 호텔 건립에도 나섰다. 운영은 귀농한 젊은 주민이, 룸 관리와 숙박객 응대는 방을 내놓은 마을 어르신이 맡는 수평적 형태의 ‘마을호텔’이다. 주민들이 직접 요리하는 마을식당은 완공했고, 북카페와 세미나실까지 지으면 올해 하반기엔 개장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조 대표는 “마을 주민 평균나이가 70세인데 10~20년 후엔 마을이 없어진다”며 “마을 소멸을 막기 위해선 청년과 어르신이 같이 할 수 있는 사업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게 바로 마을호텔”이라고 했다.

일을 시작해보니 목표는 더 커졌다. 지리산권 마을호텔 체인 건설이다. “지리산을 둘러싼 지자체가 하동까지 5개가 있거든예. 산청, 함양, 남원, 구례에 각각 마을호텔 체인을 만들고 싶어요. 그라믄 호텔 체인 사장 되는 거 아입니꺼. 하하” 세대교체의 소망이 담긴 “가능한 대표 자리는 짧게!”라는 그의 바람은 쉽사리 이뤄지진 않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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