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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목포→전주→강릉…서울 교수의 지방 한달살이 속사정 [추기자의 속엣팅]

중앙일보

입력

추기자의 속엣팅

한 사람의 소개로 만나 속엣말을 들어봅니다. 그 인연을 통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요. 인연 따라 무작정 만나보는 예측불허 릴레이 인터뷰를 시작합니다.

[프롤로그] 지난해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전북 진안 시골 마을의 작은 카페에서 우연히 ‘서울 남자’와 찰나의 순간을 함께 했습니다. 전주 한 달 살이를 막 마친 정석 교수였죠. 서울에서 ‘잘 나가는 분’이 갑자기 왜 지방에서 한 달 살이를 하는 걸까요. 잠시 스친 인연을 빌미로 카페 주인장을 통해 정식으로 인터뷰를 청했습니다.

정석(60)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의 새해 목표는 거창하다. 1년에 100만명 탈수도권을 통해 각 지방이 독립된 국가가 되는 ‘로컬 리퍼블릭’을 이루자는 ‘일백탈수 지역민국’ 운동에 “남은 인생을 걸었다”고 했다. “갑자기 연고도 없는 지역에 가는 건 어려우니 한 달 살이 안되면 일주일 살이라도 해보자는 것”이다. 지난해부터 틈틈이 지방 한 달 살이를 시작한 이유다.

‘대자보’ 하나면 시골서도 뚜벅이 여행! 

정석 서울시립대 교수가 10일 서울 동대문구 서울시립대 교수연구실에서 하동 한달살이 때 그렸던 대중교통 연계 지도를 들어보이고 있다. 김성룡 기자

정석 서울시립대 교수가 10일 서울 동대문구 서울시립대 교수연구실에서 하동 한달살이 때 그렸던 대중교통 연계 지도를 들어보이고 있다. 김성룡 기자

지난달 10일 찾은 그의 연구실. 한지에 먹으로 그린 작은 그림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지난해 3월 하동 한 달 살이 때 불편을 겪었던 대중교통 문제를 해소할 아이디어를 담은 ‘대자보(대중교통+자전거+보행) 생활도시’ 지도다. 지리산을 둘러서 전기버스 전용도로를 구축하고 하동 군내는 미니 친환경버스로, 마을 안은 전기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여행할 수 있도록 하자는 내용이다. 하동군수에도 전달했다. 지난 2020년 하동의 달마중 행사에 참여했다가 “꼭 한 달 살아봐야겠다”고 결심한 뒤 실천해 얻은 결실이다.

그의 다음 발길을 목포로 이끈 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실패해도 괜찮다’는 모토의 단기거주 프로그램 ‘괜찮아마을’이었다. 숙소는 건어물 상인들이 운영하는 건맥스테이. 낮에는 이곳에 거주하는 청년들과 만나거나 코워킹스페이스에서 작업하고, 저녁에는 건맥펍에서 매일 맥주를 마셨다는 그는 “누구도 닦달하지 않는 마을에서 아이디어와 재미가 펑펑 터지더라”라고 했다. 전주에선 도서관 순례를 하면서 오후엔 아이들과, 저녁엔 어른들과 독서모임을 하고 전북 청년들의 모임인 청년모정의 ‘괜찮은 인턴’ 직책도 얻었다. 이렇게 만난 ‘로컬에서 더 행복한 사람들’은 그때그때 유튜브에 소개한다.

정석 교수가 지난 2020년 아내와 함께 참여한 하동 달마중 행사. 섬진강변 백사장에서 보름달을 맞이하는 행사로, 그는 ″모래밭을 걷고 그대로 누우세요 하더니 베토벤 월광 소나타를 틀어주는데 정말 끝내줬다″고 했다. [사진 정석]

정석 교수가 지난 2020년 아내와 함께 참여한 하동 달마중 행사. 섬진강변 백사장에서 보름달을 맞이하는 행사로, 그는 ″모래밭을 걷고 그대로 누우세요 하더니 베토벤 월광 소나타를 틀어주는데 정말 끝내줬다″고 했다. [사진 정석]
정석 교수는 전주 한달살이 중 초등학생 아이들과 정기 독서모임을 가졌다. 한달살이가 끝나는 날 동네에선 음악회를 열어줬다. 정 교수는 아이들에게 '고맙상'과 '기발한 발상'을 받았다. [사진 정석]
정석 교수는 전주 한달살이 중 초등학생 아이들과 정기 독서모임을 가졌다. 한달살이가 끝나는 날 동네에선 음악회를 열어줬다. 정 교수는 아이들에게 '고맙상'과 '기발한 발상'을 받았다. [사진 정석]

한 달 살이 중간평가는. “조용히 나와 대면하려면 하동, 다이나믹한 삶을 찾는다면 목포, 따뜻함이 그리우면 전주로 가세요.” 그는 지난달 18일 강원도 강릉 한 달 살이를 시작했다. “제주도 다음으로 청장년 이민이 많다는 강원도를 가지 않고선 지방 한 달 살이를 끝낼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발달장애 아들, 시련인 줄 알았는데 선물”  

정석 교수의 책상에는 지구본이 있다. 어릴 때부터 "인류는 왜 인종과 종교가 다르다고 싸울까"를 고민하며 지구본을 끼고 살았다는 정 교수는 한때 외교관을 꿈꿨다. 김성룡 기자

정석 교수의 책상에는 지구본이 있다. 어릴 때부터 "인류는 왜 인종과 종교가 다르다고 싸울까"를 고민하며 지구본을 끼고 살았다는 정 교수는 한때 외교관을 꿈꿨다. 김성룡 기자

이런 행보를 관통하는 화두는 ‘상생’이다. 정 교수는 어릴 때부터 지구본을 끼고 살면서 “인류는 왜 인종이나 종교가 다르다고 싸울까”를 고민했다고 한다. 외교관을 꿈꿨고 정치외교학과 원서까지 접수했다. 결국 면접 전날 건축 드라마를 본 덕분에 고민 끝에 다른 길을 택했지만, 지금도 그의 책상엔 지구본이 있다. 그래서 마지막 책으로 쓰고 싶은 주제가 ‘이타도시’다. “아파트 단지마다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서만 잘 사는 이기적인 도시가 아닌, 시골 동네에서 상생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고 싶단다.

아이 넷을 둔 아빠로서도 상생은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의 둘째 아들 정도운(27) 작가는 4살 때 자폐성 발달 장애 판정을 받았다. 정 교수는 큰 수술을 받던 첫째에게 집중하느라 둘째를 부모님 댁에 맡긴 탓 아닐까 자책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시련인 줄 알았는데 선물이었다”고 고백한다. “능력과 성향의 차이이지, 불능(disability)이 아닌 다름(difference)”이라면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공존하는 사회를 만드는 발달장애 부모모임에서도 활동하는 그는 “누구나 인생이 무탈하기를 기도하지만 아무 일이 없는 삶이 목적은 아니다”라며 “때로는 시련을 통해 더 많이 배우고 깨닫게 되더라”라고 했다.

주택 공급할수록 집값은 올라간다고? 

정석 교수는 부동산 이야기가 나오자 목소리가 커졌다. 그는 "수도권에 주택을 공급할수록 집값은 더 올라간다"며 "기득권의 욕구에 정부가 주택 공급으로 화답하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김성룡 기자

정석 교수는 부동산 이야기가 나오자 목소리가 커졌다. 그는 "수도권에 주택을 공급할수록 집값은 더 올라간다"며 "기득권의 욕구에 정부가 주택 공급으로 화답하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김성룡 기자

도시 전문가에게 부동산 문제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목소리가 커졌다. “수도권에 주택을 공급할수록 집값은 더 올라간다”고 했다. “성인이 된 우리 아이들도 선뜻 공감해주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이면서다. 정 교수는 “신도시를 지으면 비수도권 사람들을 끌어오고 수요는 계속 늘어 가격을 끌어올리는 장이 된다”며 “사람들을 비수도권으로 가게 해야 집값이 내려간다”고 주장했다. “집값 문제에서 강력하게 발휘되는 기득권의 욕구에 정부가 주택 공급으로 화답하는 꼴”이라고도 했다.

“대한민국 만병의 근원은 수도권 집중”을 외치는 정 교수지만, 지방 정치인들이 앞다퉈 공약하는 메가시티 구축에는 반대한다. “이미 실패로 판명된 성장거점개발론의 비수도권 버전”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는 “골고루 키울 시간 없으니 대기업, 대도시 키웠는데 다 커서 골고루 나눴나. 그렇지 않았다”며 “대도시는 모든 걸 뺏는 블랙홀”이라고 강조했다.

사실 대한민국은 이미 인구소멸 1호로 꼽힌 국가다. 데이비드 콜먼 옥스퍼드대 교수는 지난 2015년 한국의 저출산 추세가 지속한다면 2750년 인구가 소멸할 것으로 전망했다. 정 교수 역시 “한국 인구 절반이 국토의 10%에 몰려 있다. 20~30년만 지나면 시골엔 사람 없는 마을이 부지기수로 나온다. 지방이 소멸하면 국가도 살아남지 못한다”며 “의료와 일자리, 교육에 대한 믿음만 주면 지방으로 가려는 사람은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국토를 몸으로 보자면 머리(수도권)에 피가 너무 몰려서 터지기 직전이고, 손끝 발끝(지방)은 피가 안 돌아서 괴사 직전이죠. 저는 지방 살리기에 제 남은 인생을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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