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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대놓고 한복 야망 꺼냈는데…"우리 문화 퍼진다"는 황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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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중국 베이징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개막식에는 중국 내 56개 민족 대표가 참가해 차례로 오성홍기를 넘기는 행사가 마련됐다. [연합뉴스]

지난 4일 중국 베이징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개막식에는 중국 내 56개 민족 대표가 참가해 차례로 오성홍기를 넘기는 행사가 마련됐다. [연합뉴스]

베이징 겨울 올림픽이 시작부터 ‘문화 공정(다른 나라의 고유 문화를 중국이 원조인 것처럼 주장하는 행태)’ 논란에 휩싸였다. 중국 베이징 국립 경기장에서 열린 개막식 행사에 한국의 전통 의복인 한복이 등장하면서다. 개막 전부터 미국 주도의 '외교적 보이콧'(선수단만 참가하고 정부 대표단은 보내지 않음) 동참을 두고 국내 여론이 양분됐는데, 올림픽이 시작되자마자 한복 논란으로 반중 정서가 불붙는 분위기다.

지난 4일 개막식엔 중국 내 56개 민족 대표가 차례로 오성홍기를 전달하는 퍼포먼스가 포함됐는데, 이 중 조선족 여성이 댕기머리를 한 채로 한복을 입고 등장한 장면이 문제가 됐다.

한복 입은 조선족에 '문화침탈' 반중 여론 

조선족 대표로 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한 중국인 여성. 댕기머리를 하고 한복을 입은 채로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조선족 대표로 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한 중국인 여성. 댕기머리를 하고 한복을 입은 채로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이는 중국 국적인 한국계 중국인 조선족이 한복을 입고 등장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한복은 우리의 것일 뿐 아니라 동포들의 것이기도 하며, 중국 국민으로 살아가는 조선족 동포 역시 자신들의 의복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5일 강민진 청년정의당 대표)는 의견도 있다.

문제는 그간 중국 일각에서 한복을 한푸(汉服)로 칭하며 억지 원조 주장을 펼친 탓에 국내엔 중국의 문화 왜곡에 대한 반감이 뿌리 깊게 자리잡았다는 점이다. 2020년 10월 중국 게임 ‘샤이닝 니키’에 한복을 입은 캐릭터가 등장했는데, SNS를 중심으로 “한복의 원조는 중국”이라는 주장이 퍼졌다. 

국내에서 전 세계가 지켜보는 올림픽 개막식에까지 버젓이 한복을 등장시킨 만큼 향후 중국의 문화 공정이 더욱 거침없어질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이번 퍼포먼스 자체를 고의로 인식하는 분위기도 있다. 또 이번 개막식 행사를 통해 '한복이 중국 소수민족의 고유 의복'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국제사회에 번질 소지가 있다.

한복·김치·태권도까지 계속된 中 문화공정 

중국은 2020년 말 절임채소 음식인 파오차이 제조법을 국제표준화기구에 등록했고, 이후 중국 내에서 "김치의 원조는 파오차이"란 왜곡된 주장이 퍼졌다. [중앙포토]

중국은 2020년 말 절임채소 음식인 파오차이 제조법을 국제표준화기구에 등록했고, 이후 중국 내에서 "김치의 원조는 파오차이"란 왜곡된 주장이 퍼졌다. [중앙포토]

중국은 한복에 대해서만 억지를 부려온 게 아니다. 2020년 말엔 중국이 절임채소 음식인 파오차이(泡菜)의 제조법을 국제표준화기구(ISO)에 등록하면서, ‘김치의 원조는 파오차이’라는 왜곡된 주장이 퍼졌다. 당시 중국 관영 인민일보의 자매지 환구시보는 “중국이 김치 산업의 6개 국제 표준을 제정했다”고 보도하며 식(食)문화 왜곡에 앞장섰다.

또 지난해 4월엔 중국의 한 액션 배우가 “모든 무술의 기원은 중국이다. 태권도 역시 중국 발차기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중국 게임 샤이닝니키에 등장한 캐릭터. 한국의 전통 의상인 한복을 입고 있다. [유튜브 캡처]

중국 게임 샤이닝니키에 등장한 캐릭터. 한국의 전통 의상인 한복을 입고 있다. [유튜브 캡처]

한·중 화약고 된 '문화' 갈등 

중국의 이같은 문화공정은 국내 반중 정서가 고착화하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중앙일보·서울대아시아연구소 공동기획 ‘민심으로 읽은 새 정부 외교과제’(1월 18~20일 연속보도)의 빅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2021년 한·중 관계를 다룬 851만여건의 네이버 기사를 분석한 결과 1000개 이상의 댓글이 달린 기사는 대부분 중국의 문화 왜곡 시도에 대한 보도였다.

▲중국의 한복 원조 주장 ▲중국 태권도 기원 논란 ▲중국 파오차이 김치 원조 주장 등 ▲중국의 오징어게임 체육복 원주 주장 등을 다룬 보도가 대표적이었다.

이는 한·중 관계와 관련해 여론이 가장 뜨겁게 반응하는 것은 중국의 문화 왜곡 시도라는 방증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반응이 반중 정서의 촉매제 역할을 하며, 문화 이슈가 사실상 한·중 관계의 화약고로 자리잡은 셈이다. 

손 놓은 정부, 반중 정서 키운다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5일 개막식에서 한복이 중국 소수민족 문화로 표현된 것에 대해 입장을 밝혔다. [연합뉴스]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5일 개막식에서 한복이 중국 소수민족 문화로 표현된 것에 대해 입장을 밝혔다. [연합뉴스]

특히 중국의 계속된 문화 왜곡 시도에 한국 정부가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미온적으로 대응한 것 역시 국내의 반중 정서를 키우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일례로 지성호 국민의힘 의원실이 외교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8~2021년 일본 내 교과서의 역사 왜곡을 이유로 정부가 주한 일본 대사관 관계자를 초치한 횟수는 6건, 항의 논평 발표는 2건, 성명 발표는 2건이었다. 같은 기간 중국 역사 교과서들에도 "수 양제(수나라 황제)가 고구려를 정벌했다" 등 왜곡이 상당수 있었지만, 이에 대한 공식 대응은 없었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번 한복 논란에 대해서도 “중국 측에 고유한 문화에 대한 존중과 문화적 다양성에 기초한 이해 증진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지속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한복이 전 세계의 인정을 받는 우리의 대표적인 문화 중 하나라는 점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고만 밝혔다. 논평이나 성명, 혹은 출입기자단에 전체 공지하는 형식이 아니라 문의하는 언론사에만 준비해놓은 입장을 알려주는 식으로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중국 정부 차원이 아니라 민간에서 제기되는 주장이라 해도 적절한 대응 방법을 모색하고 재발 방지책을 마련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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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이번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의 한복 논란에 대해서도 정부 대표단을 이끄는 황희 문체부 장관은 “양국 간 좋은 관계에 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 있다”면서도 “(공식적인 항의 등은) 현재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오히려 “우리 문화가 확산하는 과정으로 보고 자신감, 당당함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논란의 원인은 중국의 계속된 문화 왜곡과 이에 따른 국민적 분노인데 이를 한국 문화 확산의 한 과정으로 보는 안일한 인식을 드러낸 셈이다.

논란이 거세지자 베이징 올림픽 개회식 참석차 중국을 방문한 박병석 국회의장은 5일 리잔수(栗戰書)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장과 만나 우회적 우려를 표했다. 박 의장은 이날 한국 특파원단과 가진 간담회에서 “(리 상무위원장에게 한·중 간에) 상호 고유문화가 존중돼야 한다는 뜻을 표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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