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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덩샤오핑 권력 쥐자, 지지부진 미·중 수교에 서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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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4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14〉 

미·중 양국은 정식 수교 전에도 학술과 문화교류는 활발했다. 미국으로 떠나는 중국 학술방문단 환송식을 마친 부총리 팡이(方毅. 앞줄 왼쪽 아홉 번째). 1978년 12월 26일, 베이징 인민대회당(人民大會堂). [사진 김명호]

미·중 양국은 정식 수교 전에도 학술과 문화교류는 활발했다. 미국으로 떠나는 중국 학술방문단 환송식을 마친 부총리 팡이(方毅. 앞줄 왼쪽 아홉 번째). 1978년 12월 26일, 베이징 인민대회당(人民大會堂). [사진 김명호]

닉슨과 포드는 미·중 수교를실현하지 못하고 낙마했다. 중국도 4인방의 득세로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 이후 양국의 왕래는 빈번해도 정식수교는 합의를 보지 못했다. 1976년 중국에 줄초상이 났다. 1월에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사망하고 8개월 후 마오쩌둥도 세상을 떠났다. 4인방 등쌀에 맥을 못 추던 1세대 혁명가들이 정변을 일으켰다. 4인방을 구금하고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을 전면에 내세웠다. 4인방 몰락 1개월 후, 미국도 이변이 일어났다. 39대 대선에서 무명의 지미 카터가 포드에게 승리했다.

카터, 어릴 때부터 중국에 호기심

부주석 쑹칭링(宋慶齡)은 아이작 스턴을 베이징으로 초청해 바이올린 연주 듣기를 즐겼다. 왼쪽 첫째는 외교부장 황화. [사진 김명호]

부주석 쑹칭링(宋慶齡)은 아이작 스턴을 베이징으로 초청해 바이올린 연주 듣기를 즐겼다. 왼쪽 첫째는 외교부장 황화. [사진 김명호]

카터는 어릴 때부터 중국에 호기심이 많았다. 1982년에 출간된 첫 번째 회고록에 이런 내용을 남겼다. “1930년대, 중국에서 활동 중인 침례교 목사의 선교일기 접하며 중국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해군 무전병이던 외삼촌은 수시로 중국 해안을 오갔다. 상하이(上海)와 칭다오(靑島)에 정박하면 현지 풍물이 담긴 우편엽서에 근황을 적어 보냈다. 나는 글보다 사진이 더 신기했다.”

미·중 양국은 거의 동시에 새로운 권력자가 등장했다. 사람이 바뀌자 지지부진했던 미·중 수교에 서광이 들기 시작했다. 당선이 확정된 카터가 국무장관 키신저에게 중국 문제에 관한 자문을 구했다. “중국인을 신뢰해도 될지 궁금하다.” 키신저는 중국에 대한 좋은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중국인은 강하면서도 유연하다. 자존심과 인내심은 말도 못한다. 받은 만큼 돌려준다. 구두로 한 약속은 손해를 봐도 이행한다.”

카터는 중국과 수교를 결심했다. 취임 전, 닉슨과 키신저가 중국 지도자들과 주고받은 회담기록과 포드가 중국을 향해 발표했던 성명을 분석했다. “미·중 관계 정상화의 관건은 대만 문제”라는 결론을 내렸다. 취임 1개월 후인 1977년 2월, 중국의 워싱턴 주재 중국연락처 주임 황쩐(黃鎭·황진)과 회담 자리를 마련했다. 카터의 목적은 중국 최고 지도자의 의중을 탐색하기 위함이었다. 황쩐은 카터를 실망시켰다. 정식 외교관계 수립에는 관심이 없었다. 소련 비난에만 입에 거품을 물었다. 카터가 화제를 바꿨다. 중국 지도자의 미국 방문이 가능한지를 타진했다. 황쩐의 답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대만 대사가 워싱턴에 주재하는 한, 중국 지도자의 미국 방문은 불가능하다.”

정식 수교 후 연락처 간판도 대사관으로 교체했다. 1979년 3월, 워싱턴 D.C. [사진 김명호]

정식 수교 후 연락처 간판도 대사관으로 교체했다. 1979년 3월, 워싱턴 D.C. [사진 김명호]

카터는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5월 25일, 인디애나주의 노트르담 대학에서 외교정책 밝히며 중국 측에 메시지를 보냈다. 양국 관계의 지속  과 정상적인 외교관계가 미국의 이익에 미칠 중요성을 강조했다. 동시에 포드가 임명한 베이징 주재 미국연락처 주임 게이츠를 전국 자동차 노조 위원장 레오날드 우드콕으로 경질했다. 당시 중국에 유행하던 “무산계급 사유(思惟)”를 이해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중국도 화답했다. 황쩐을 차이쩌민(柴澤民·시택민)으로 교체했다. 우드콕은 부인과 15년째 별거 상태였다. 베이징 부임 후 연락처 전담 간호사와 눈이 맞았다. 주임 업무보다 데이트에 열중했다.

같은 해 7월, 부총리 덩샤오핑이 당과 정부, 군을 완전히 장악했다. 미국이 먼저 중국을 떠봤다. 8월 말, 국무장관 밴스가 베이징을 방문, 외교부에 닉슨과 포드 시절보다 못한 제안을 하고 덩과 회담했다. 밴스가 시험 삼아 던진 돌을 덩이 노련하게 받았다. “제안한 문건을 봤다. 5년 전 닉슨 대통령과 협의한 내용은 양국 관계 정상화의 기점이었다. 그간 발전은커녕 후퇴했다. 대만 문제는 중국인들끼리 해결할 문제다. 중국인들은 해결할 능력이 있다. 미국 친구들이 우리 대신 걱정할 이유가 없다. 미국은 우리에게 대만을 무력으로 해방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고 싶어한다. 엄밀히 말하면 내정간섭이다. 미국의 전략은 북극곰(소련)에게만 유리할 뿐이다. 미국은 온갖 이유 들이대며 대사관 설치와 대사 교환을 질질 끈다. 명칭은 중요하지 않다. 연락처건 대사관이건 간판 바꿨다는 것 외에는 별 의미가 없다. 그간 우리는 여러 차례 성명 주고받으며 서로를 시험했다. 공통점을 더 찾기 위해 인내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

덩샤오핑 부총리, 당·정부·군 장악

밴스의 빈손 귀국은 카터에게 중국을 더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 전 베이징 주재 미국연락처 주임 부시에게 중국 방문을 요청했다. “덩샤오핑의 속내를 파악해 주기 바란다.” 부시를 만난 덩은 재차 강조했다. “중·미 관계 정상화에 속도가 필요하다. 미국 정부와 국회의 정치가들은 먼발치에서 정치적인 관점으로 중·미 관계를 봐야 한다. 외교 문제가 아닌 정치문제로 이해하면 결단을 내리기 쉽다.”

1978년 4월, 카터 행정부의 공개 선언에 세계가 진동했다. “미국은 ‘1개의 중국’이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일관된 주장을 승인한다.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정식 외교관계 수립은 미국의 이익과 부합된다.” 국무장관 밴스도 성명을 냈다. “카터 대통령의 1차 임기가 끝나기 전, 가장 중요한 목표는 미·중 관계 정상화의 실현이다.” 같은 무렵, 덩샤오핑도 미국 손님 만날 때마다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미국 정부와 대통령이 양국 관계 정상화에 보다 적극적인 태도 취하기를 희망한다. 빠를수록 좋다.”

미국은 행동으로 화답했다. 백악관 안보보좌관 브레진스키를 태운 부통령 전용기가 중국으로 향했다. 5월 20일 베이징공항에 착륙한 브레진스키는 외교부장 황화(黃華·황화)를 발견하자 흥분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밴스처럼 빈손으로 돌아갈 염려는 없다는 징조였다. 30년 후 당시를 회상했다. “덩샤오핑과 오랜 시간 회담했다. 대만 문제가 가장 민감했다. 일단 수교부터 하고 대만 문제는 차후에 시간을 두고 상의하기로 합의했다. 회담 마친 후 덩 부총리와 베이하이(北海)공원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일정에 없던 예우에 나는 감동했다. 만찬 도중 덩이 미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첫날 저녁은 우리 집에서 미국식 만찬을 대접하겠다는 답이 고작이었다. 덩의 말은 구체적이었다. 중국 최대의 명절인 춘제(春節·설날)의 저녁을 미국에서 하겠다며 즐거워했다.” 8개월 후, 두 사람 모두 약속을 지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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