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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은 양장, 신부는 조선 옷에 면사포” 1930년대 짬뽕 결혼식 아시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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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문화사』 1권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에 실린 1910년대 신식 결혼 모습. [중앙포토]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문화사』 1권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에 실린 1910년대 신식 결혼 모습. [중앙포토]

“신랑만 양장을 하고 신부는 그대로 조선 옷에 면사포 한 가지만 뒤집어쓴 것을 보면 무슨 ‘퉈이’ 결혼식 갓기도 하야 아모리 호의로 보아도 어울리지 안코 서투르게만 보인다.”

1931년 8월 26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 일부다. 그해 여름 이 신문은 13회에 걸쳐 결혼식 문화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면서 서양식 예복 대신 ‘백의(白衣)’를 입고 주례 없이 지인들 앞에서 결혼 배경만 간단히 소개하고 반지만 교환하라고 제안했다. 결혼식 음식도 경제적 부담을 준다며 도시락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이른바 ‘작은 결혼식’인 셈이다.

당시 결혼식의 어색한 풍경, 즉 ‘서양+동양’이라는 두 문화의 혼합은 요즘 결혼식에서도 여전히 보인다. 본식은 웨딩드레스 등을 입고 서양식으로 치른 뒤, 한복으로 갈아입고 폐백실로 향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가 내놓은  『두 가지 스타일의 한국 결혼식-전통과 현대의 이중주』는 이런 결혼식 모습은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됐는지를 추적한 학술 교양서다.

1920년 나혜석과 김우영의 결혼식 사진. [사진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1920년 나혜석과 김우영의 결혼식 사진. [사진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우리나라와 중국의 습속은 현격히 다른 데다 송나라로부터 지금까지 500여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그간에 자연히 서로 억지로 갖다 맞출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라서…” 조선 후기 실학자 안정복이 쓴  『순암집』의 일부다. 안정복이 지적한 것은 조선 후기부터 유행한 중국식 결혼 문화가 우리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식 결혼식은  『의례(儀禮)』의  『사혼례(士婚禮)』에서 규정한 것으로 송나라 때 발전했다. 신랑을 중심으로 예식을 구성한 게 특징이다. 신랑 측에서 신부 측에 혼인을 요청하는 납채(納采), 신랑 친척이 신부를 데려와 신랑 집에서 혼례를 치르는 친영(親迎) 등이 그 예다. 중국은 부계 중심 혈연제도가 뿌리가 깊었다.

조선 시대 사대부 문중의 혼례는 신붓집에서 치렀다. 처가에서 자녀를 낳고 키우다가 아이가 자라면 신랑 집으로 돌아가는 게 전통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율곡 이이도 외가인 강릉에서 자랐다. 그래서 결혼을 ‘장가(丈家·처가)간다’고 했다. 안정복은 이를 고구려부터의 ‘고례’라고 강조했다. 재산은 아들·딸에게 균등 상속했고, 조상 제사도 아들·딸이 번갈아 지냈다. 즉 아들·딸의 지위가 거의 동등했기 때문에 중국식 혼례 문화가 맞지 않았다. 조선 후기는 중국식 풍속을 따르는 것이 최첨단으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왕실부터 앞장서서 중국식을 따랐고, 이는 곧 민간으로 퍼졌다. 안정복은 어중간한 지점에서 타협했다. 사위를 맞아들여 함께 기거하다가 2년 뒤 시가로 딸을 보냈다.

1920년 4월 10일 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나혜석·김우영의 결혼. [사진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1920년 4월 10일 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나혜석·김우영의 결혼. [사진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1920년 4월 15일 당시 ‘셀럽’이던 서양화가 나혜석과 변호사 김우영의 결혼식이 서울 정동예배당에서 열렸다. 이 결혼식은 신문에 광고가 실렸을 정도로 세간의 화제를 모았다. 모던보이와 모던걸의 결혼식은 이처럼 예배당에서 열리는 경우가 많았다. 가톨릭과 개신교 신자가 늘어났고, 서양식 문화가 퍼진 결과였다. 신부가 면사포를 쓰고 신랑·신부가 반지를 교환하는 문화는 이때 정착됐다.

잘못 전해진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꽃을 뿌리는 풍습이 오색종이나 줄을 던지는 식으로 변형됐고, 심한 경우 구두나 양말을 뿌리는 광경도 연출됐다고 한다. 서양식 결혼 문화의 도입은 결혼식 비용을 늘리는 요인이 됐다. 조선총독부 학무당국은 1933년 ‘의례의 준칙 제정에 관한 사항’을 발표하면서 “현하 조선에서 행해지는 다양한 혼상 등에 대한 의례에 걸쳐있는 사항이 극도로 많아서 무용의 시간을 버리고 막대한 비용을 투여하여 가계가 기울고 가산이 파산되는 폐해가 적지 않다”라고 지적했다.

지금의 결혼식 틀이 완성된 건 1969년 3월 5일 박정희 정부가 발표한 ‘가정의례준칙’을 통해서다. 이에 따라 결혼식 순서는 ①개시 ②신랑 입장 ③신부 입장 ④신랑 신부 맞절 ⑤신랑 신부 서약 ⑥예물 증정 ⑦성혼선언문 낭독 ⑧주례사 ⑨양가 대표 인사 ⑩신랑 신부 인사 ⑪신랑 신부 퇴장 ⑫폐식 순으로 구성된다.

1973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순시에서 “강제 규정을 만들어서라도 쓸데없는 낭비를 막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정부는 1973년 6월부터 약혼식 폐지, 답례품 및 피로연 금지, 화환이나 테이프 사용 금지 등을 ‘가정의례준칙’에 추가했다. 위반하면 5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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