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엔 신문광고도 냈다···"가산 파산" 韓 짬뽕 결혼식 기원

중앙일보

입력 2022.01.29 13:21

업데이트 2022.01.30 19:32

19세기 화가 김준근의 '신부연석' [사진 국립중앙밥ㄱ물관 편저, '조선시대풍속화'

19세기 화가 김준근의 '신부연석' [사진 국립중앙밥ㄱ물관 편저, '조선시대풍속화'

"신랑만 양장을 하고 신부는 그대로 조선 옷에 면사포 한 가지만 뒤집어 쓴 것을 보면 무슨 '퉈이' 결혼식 갓기도 하야 아모리 호의로 보아도 어울리지 안코 서투르게만 보인다."

동아일보 1931년 8월 26일자에 실린 기사 일부. 이해 여름 동아일보는 13회에 걸쳐 결혼식 문화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면서 서양식 예복대신 '백의(白衣)'를 입고 주례없이 지인들 앞에서 결혼 배경만 간단히 소개해고 반지만 교환하라고 제안했다. 또 결혼식 음식도 경제적 부담을 준다며 도시락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이른바 '작은 결혼식'인 셈이다.

당시 지적된 결혼식의 어색한 풍경, 즉 '서양+동양'이라는 두 가지 문화의 혼합은 한국 결혼식에서도 여전히 나타난다. 본식은 웨딩드레스 등을 입고 서양식으로 치른 뒤, 한복으로 갈아입고 폐백실로 향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가 내놓은 『두 가지 스타일의 한국 결혼식-전통과 현대의 이중주』는 이런 결혼식의 모습은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인지를 추적한 학술 교양서다.

1920년 4월 10일 동아일보에 실린 나혜석 결혼 광고 [사진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1920년 4월 10일 동아일보에 실린 나혜석 결혼 광고 [사진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조선 후기: 신랑 중심의 중국식 문화 침투

"우리나라와 중국의 습속은 현격히 다른 데다 송나라로부터 지금까지 500여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그간에 자연히 서로 억지로 갖다 맞출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라서…"

조선 후기 실학자 안정복이 쓴 『순암집』의 일부다. 안정복이 지적한 것은 조선 후기부터 급속도로 퍼진 중국식 결혼 문화가 조선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때 퍼진 중국식 결혼식은 『의례(儀禮)』의 「사혼례(士婚禮)」에서 규정한 것으로 중국 송나라 때 발전한 방식이다. 신랑을 중심으로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면 신랑 측에서 신부 측에 혼인을 요청하는 납채(納采),  신랑의 친척이 신부의 집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 와서 신랑 집에서 혼례를 치르는 친영(親迎) 등이다.
중국에서는 부계 중심 혈연제도가 뿌리가 깊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사대부 문중의 혼례는 신부의 집에서 치러졌고 처가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다가 자녀가 성장하면 신랑 집으로 돌아가는 게 전통이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율곡 이이도 외가인 강릉에서 자랐고 이는 당시 흔한 풍경이었다. 그래서 결혼을 '장가(丈家·처가집) 간다'고 했다.

안정복은 이를 고구려부터의 '고례'라고 강조했다. 또한 남녀 자녀에게 균등 상속했고, 조상의 제사도 남녀 자녀가 번갈아 지냈다. 즉 아들과 딸의 지위가 거의 동등했기 때문에 이런 중국식 혼례 문화가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중국의 풍속을 따르는 것이 최첨단으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왕실에서부터 솔선수범하며 중국식을 따르기 시작했고, 이는 곧 민간으로 퍼졌다.
안정복은 어중간하게 타협했다. 자신의 사위를 맞이해 함께 기거하다가 2년 뒤 시댁으로 딸을 보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문화사` 시리즈 제1권으로 나온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에 실린 사진. 1910년대 신식 결혼식 사진. 신식 결혼식은 서양 종교와 새로운 사조의 영향을 받아 1900년 무렵 시작됐다. [중앙포토]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문화사` 시리즈 제1권으로 나온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에 실린 사진. 1910년대 신식 결혼식 사진. 신식 결혼식은 서양 종교와 새로운 사조의 영향을 받아 1900년 무렵 시작됐다. [중앙포토]

일제강점기: 서양식 예복의 등장
1920년 4월 15일 서울 명동 정동 예배당에서는 당시 '셀럽'이던 서양화가 나혜석과 변호사 김우영의 결혼식이 열렸다. 이 결혼식은 신문에 광고가 실렸을 정도로 세간의 화제를 모았다. 모던보이와 모던걸의 결혼식은 이처럼 기독교 예배당에서 열리는 경우가 많았다. 가톨릭과 개신교 신자들도 늘어났고, 서양의 문화가 자연스레 확산된 결과였다.
신부가 면사포를 쓰고 신랑·신부가 반지를 교환하는 문화는 이때 정착됐다.
잘못 인식된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서양에서 꽃을 뿌리는 풍습이 오색종이나 줄을 던지는 식으로 변형됐고, 심한 경우에는 구두나 양말을 뿌리는 광경도 연출됐다고 한다. 서양 결혼 문화의 도입은 결혼식 비용을 늘리는 요인이 됐다.

조선총독부 학무당국은 1933년 '의례의 준칙 제정에 관한 사항'을 발표하면서 "현하 조선에서 행해지는 다양한 혼상 등에 대한 의례에 걸쳐있는 사항이 극도로 많아서 무용의 시간을 버리고 막대한 비용을 투여하여 가계가 기울고 가산이 파산되는 폐해가 적지 않다"라고 지적했다.

1960년대: 현대 결혼식의 정착 
현재 결혼식의 틀이 완성된 것은 1969년 3월 5일 박정희 정부가 발표한 '가정의례준칙'에서다.
이에 따르면 결혼식의 순서는 ①개시 ②신랑 입장 ③신부 입장 ④신랑 신부 맞절 ⑤신랑 신부 서약 ⑥예물 증정 ⑦성혼선언문 낭독 ⑧주례사 ⑨양가 대표 인사 ⑩신랑 신부 인사 ⑪신랑 신부 퇴장 ⑫폐식 순으로 구성된다.

1995년 연세대 백주년기념관에서 `제2회 생활예절 발표회`를 열어 혼례의 현대적 모형을 제시하며 폐백을 보여주고 있다 [중앙포토]

1995년 연세대 백주년기념관에서 `제2회 생활예절 발표회`를 열어 혼례의 현대적 모형을 제시하며 폐백을 보여주고 있다 [중앙포토]

하지만, 1973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순시에서 "강제 규정을 만들어서라도 쓸데없는 낭비를 막도록 하라"고 지시를 하는 등 잘 지켜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정부는1973년 6월부터 약혼식 폐지, 답례품 및 피로연 금지, 화환이나 테이프 사용 금지 등을 '가정의례준칙'에 추가하기도 했다. 위반하면 5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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