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보았던 영화들의 몇몇 장면은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설렘과 행복에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꿈은 평생 우리와 함께한다.”
중국 거장 장이머우(72) 감독이 새 영화 ‘원 세컨드’(27일 개봉)를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바치는 헌사”라면서 한 얘기다. 그가 본지 e메일 인터뷰에 19일 답변을 보내왔다.
‘원 세컨드’는 오래전 헤어진 딸이 단 1초간 나오는 필름을 보기 위해 사막 한복판 외딴 마을의 영화관에 찾아온 사내 장주성(장역)과 동생을 지키기 위해 필름을 훔쳐야 하는 소녀 가장 류가녀(류하오춘)의 여정을 좇는다. 사고로 먼지를 뒤집어쓴 필름을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씻어 말리는 광경부터 극장 뒤쪽 작은 영사실에서 스크린을 향해 빛이 뿜어져 나오는 순간까지 필름 시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장면이 많다. 필름이 사람을 울리고, 또 눈물을 닦아준다. 장이머우 판 ‘시네마 천국’(1988)이라 해도 좋을 정도다. 그가 전작 ‘5일의 마중’(2014) 이야기에 바탕이 됐던 옌거링의 소설 『나의 할아버지가 탈옥한 이야기(중국 문화대혁명을 헤쳐온 한 남자의 일생)』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든 작품이다.
27일 개봉 '원 세컨드' 장이머우 감독 #문화대혁명 시대 필름 사랑 담아 #"생활이 고달플수록 사람들은 #밤하늘 우러러보았다"
시진핑 시대 中 거장이 '문화대혁명' 돌아본 이유
그런데 이 영화는 2019년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다가 “기술적인 이유”를 들어 돌연 출품을 철회해 중국 당국의 압력 때문이란 의혹을 낳기도 했다. 극의 배경이 중국 정부가 민감하게 여기는 문화대혁명 시기여서다. 문화대혁명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중국 최고지도자 마오쩌둥이 주도해 중국의 전근대적 문화와 자본주의 타파라는 기치 하에 수백만 명을 희생시킨 사회주의 운동이다.
“성장기에 문화대혁명을 겪었다”고 여러 번 말해온 장이머우 감독은 1988년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받은 데뷔작 ‘붉은 수수밭’부터 ‘인생’(1994) ‘5일의 마중’ 등 대표작마다 이 시기를 비판적으로 다뤄왔다. 베를린 출품 철회 당시 외신들은 일제히 시진핑 정부의 개입을 의심했다. 미국 매체 버라이어티는 “중국은 마오쩌둥 이후 가장 강력한 지도자인 시진핑 국가주석 치하에서 상당한 정치적, 문화적 긴축을 겪었다”고 짚었다.
“영화는 당신의 인생에 어떤 의미인가”를 묻고 싶었다는 장이머우 감독은 왜 지금, 그 무대로 문화대혁명 시기를 골랐을까. “‘이들에게 영화를 보는 건 설 명절과 같다’는 영화 속 대사처럼, 생활이 고달플수록 사람들은 밤하늘을 우러러보았다. 그 당시 영화 한 편을 보는 건 전 국민의 축제였다”고 그는 답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영화의 기획은 어떻게 출발했나.
“영화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요즘은 거의 모든 세대가 영화를 보며 자라고, 영화의 영향을 받는다. 이 영화는 개인적인 것뿐 아니라 모두의 것이기도 한, 삶의 경험과 청춘에 대한 기억을 보여준다.”
- 필름 시절에 대한 개인적인 추억도 영화에 담았을까.
“전 세계 많은 감독이 있지만, 나처럼 필름에 대한 경험이 많은 사람은 적을 것이라 농담하곤 한다. ‘원 세컨드’ 같은 영화는 아마 다른 젊은 감독들은 찍지 못할 것이다. 산업적인 측면에서 보면 ‘필름’ 시대는 이미 끝났다. 어린 시절 나는 사진 촬영, 현상, 인화, 약품 처리 등 모든 것을 스스로 배웠고 나만의 방식으로 재래식 설비 사용법을 익혔다. 현상한 필름을 떨어트려 더러워졌을 때 어떻게 물에 씻어 얼룩 없이 말릴지, 몇 번 닦아야 할지, 약품 처리한 표면이 상하진 않을지 등 영화 속 세세한 문제는 다 내가 직접 고민했던 것들이다.”
- 필름에서 디지털 촬영 방식으로 넘어오며 가장 달라진 점은.
“최근 영화들은 박자가 모두 빠르다. 나는 영화 ‘삼창박안경기’(2009)부터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산사나무 아래’(2010)를 찍을 때 주연 주동우의 한 연기 장면을 100번 정도 촬영한 적 있는데 디지털이었기에 가능했다. 영화는 기술로부터 시작된다. 다만,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은 감정이다. 사람들은 지금 많은 것을 보고 있고 조금만 지나면 어떤 기술도 새롭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원하는 신념을 지키는 것, 바로 ‘대체 영화란 무엇인가’ ‘대체 예술은 뭘 표현하고 싶은가’ 그런 것이 바로 핵심이다.”
- 장주성의 딸은 ‘영웅아녀’라는 영화 상영 전 틀어주는 중화뉴스에 단 1초간 나온다는 설정이다. ‘영웅아녀’는 실존하는 작품인가.
“그렇다. ‘영웅아녀(英雄兒女)’는 1964년 영화다. 그 당시 영화는 대부분 사적 감정 없이 집단주의만 이야기했는데 이 영화의 귀중한 지점은 개인의 감정에 와 닿는다는 것이다. 극 중 주인공이 친딸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혁명을 명분으로 한 행동이었지만 그 시절에는 극히 드물고 귀중한 행동이었다. 마침 ‘원 세컨드’의 부녀 이야기와도 잘 맞아떨어졌다.”
장이모우, 필모그래피서 딱 1초 고른다면…
- 영화는 사막에서 사막으로 끝난다. 장주성이 홀로 모래폭풍을 가로지르던 모습에서 출발해 그가 류가녀와 함께 사막에서 잃어버린 것을 찾다 말고 웃는 장면으로 맺는데.
“장주성이 수감돼있던 노동교화소는 사막에 있고 그는 아무리 걸어도 사막을 맴돌 뿐이다. 또 ‘사막에 잠긴 필름 두 칸이 아득한 모래바람 속으로 사라진다’는 것이 나만의 이상적인 엔딩이었다. 의미도 있고 서글프고 말하기 힘든 느낌이 많이 남는다.”
- 마지막 장면에 흐르는 음악이 인상적이었다.
“중국 서북지방에 수천년간 전해오는 ‘화얼(花儿)’이란 민요다. ‘화얼’은 황망한 대지에서 방목하며 살던 사람들이 외로움을 달래려 부르던 것으로 자유로운 리듬과 선율로 속박받지 않는 자유를 노래한다. 고정된 가사가 없고 지역에 따라 다르게 변화해왔지만 모두 ‘화얼’이라 불린다. 아름다운 이름이다.”
- 지금껏 찍어온 20여편 영화 중 딱 1초 분량 필름만 간직할 수 있다면.
“‘원 세컨드’에서 모든 사람이 필름을 보물단지처럼 둘러싸고 스크린으로 걸어가던 장면을 택할 것이다. 그 장면은 굉장히 상징적이다. 영화는 경이롭고 신성한 동시에 기쁨과 감동을 안겨주니까.”
- 창작자로서 지켜온 철학이라면.
“언제 어떤 것을 찍든 인연이 닿는 대로 하는 편이다. 언제나 어려운 건 내가 가장 원하는 것, 좋은 대본과 좋은 이야기를 찍어낼 수 있느냐다. 다음 영화는 여러 구상 중 내가 안 해본 것을 택하려 한다. 오는 7월 촬영을 시작하는데 ‘원 세컨드’와 전혀 다른 영화가 될 것이다.”
- 베이징 하계 올림픽에 이어 동계 올림픽 개‧폐회식도 총연출을 맡았다.
“영광스럽다. 항상 ‘아무리 좋은 생각도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런 대형 행사를 연출하는 건 여러 면에서 영화보다 ‘실행’ 측면에서 어렵다. 감독으로서 큰 도전이고 단련할 좋은 기회다.”
- 최근엔 아시아 창작자들이 할리우드를 넘어서고 있는데.
“아시아의 가장 큰 강점은 유구한 역사와 다양한 문화를 지녔다는 것이다. 이는 세계가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이다.”
- 그간 영화 홍보차 자주 방한했고 4년 전 평창올림픽 폐막식 공연을 연출하며 한국과 인연을 이어왔다. 코로나19 시국에 ‘원 세컨드’를 볼 한국 관객, 영화인들에게 전하고픈 말은.
“한국예술계에 몇몇 친구와 함께 일한 파트너들이 있다. 그들은 모두 훌륭한 예술가다. 어느 겨울 영화 홍보차 한국에 갔을 때 호텔 옆 작은 식당에서 삼계탕을 먹는데 가게 아주머니가 나를 알아보고 이름을 불러 주어 놀라웠던 기억이 있다. 비록 코로나로 인해 직접 갈 수 없지만, 관객들이 ‘원 세컨드’를 좋아해 주셨으면 좋겠다. 코로나가 벌써 2년째 전 세계를 휩쓸고 있어 어려움을 주고 있지만, 이 또한 결국 지나가리라 믿고 있다.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