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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아동 권리 스스로 지키자” 중학생 9명 힘 합쳐 동화책 펴냈죠

중앙일보

입력

흔히 아동을 단순한 보호 대상 혹은 사회적 약자로 생각하곤 하죠. 하지만 1989년 11월 20일 유엔(UN)총회에서 아동은 존엄성·권리를 지닌 하나의 주체이며 생존·발달·보호·참여의 권리를 지닌다는 ‘유엔 아동권리협약’이 채택되면서, 아동 권리를 대하는 시각이 변하기 시작했어요. 협약이 채택된 지 3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도 세계 각국을 비롯해 유엔 아동권리위원회, 유니세프, 국제앰네스티, 아동권리보장원 등 수많은 단체가 아동 권리 보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죠.

동화책 『토끼왕』에는 힘·권력을 쥐고 있는 어른들에게 권리를 침해 받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담겼다.

동화책 『토끼왕』에는 힘·권력을 쥐고 있는 어른들에게 권리를 침해 받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담겼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을 돕고자 시작된 국제구호개발 비정부기구(NGO) 월드비전도 그중 하나예요. 한국 월드비전은 가난·불평등·질병·전쟁으로 소외된 아동이 빈곤과 불평등에서 벗어나 풍성한 삶을 꿈꿀 수 있도록 힘을 보태죠. 아동·청소년 성 착취물을 제작·유포한 이른바 ‘n번방’ 사건이 터진 2020년엔 성명서 ‘디지털 성 착취 및 학대 근절-아동·청소년 중심으로 접근하라’를 배포하고, 아동권리위원회 대표 아동의 기고문을 게재하며 적극적인 대응에 나섰어요. 또, 디지털 성범죄 근절을 위한 ‘아동의 목소리 정책제안문’을 여성가족부, 교육부 양성평등정책 담당관, 학생건강정책과,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전달했죠. 이듬해인 2021년에는 아동권리협약의 국내 이행상황 관련 토론회를 열고, 이를 바탕으로 제20대 대통령선거 후보에게 전달할 아동 정책제안문을 마련했어요.

월드비전 춘천종합사회복지관 아동권리위원회에서 활동하는 춘천중학교 3학년 김래현·최성현·권혁주·성수호·은수현·이다윤·김효빈·강채린 학생(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월드비전 춘천종합사회복지관 아동권리위원회에서 활동하는 춘천중학교 3학년 김래현·최성현·권혁주·성수호·은수현·이다윤·김효빈·강채린 학생(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월드비전 춘천종합사회복지관 아동권리위원회(이하 춘천 아동권리위)에서 활동하는 춘천중 3학년 학생들 역시 어떻게 하면 아동 스스로의 힘으로 권리를 지킬 수 있을까 고민을 거듭했죠. 지난 4월부터 약 9개월의 작업 끝에 2021년 12월 동화책 『토끼왕』을 발간했습니다. 마법의 풀 덕에 강한 힘이 생긴 토끼가 왕이 돼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면서 생기는 이야기예요. 프로젝트에 함께한 월드비전 춘천종합사회복지관 김기호 과장(이하 김)은 “왕국을 제멋대로 주무르는 토끼왕 때문에 고유의 능력을 잃어버린 동물들의 모습에는 일부 어른에 의해 권리를 침해당한 아이들의 현실이 투영돼 있다”고 전했죠. 아동 권리란 무엇인지, 존중받는 아동으로서 권리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춘천 아동권리위 강채린·권혁주·김경민·김래현·김효빈(팀장)·성수호·은수현·이다윤·최성현 9명의 학생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춘천 아동권리위 학생들이 아동 권리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동화책 『토끼왕』의 스토리를 구성하고 있다.

춘천 아동권리위 학생들이 아동 권리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동화책 『토끼왕』의 스토리를 구성하고 있다.

춘천 아동권리위는 어떤 단체인가요.
김: 아동권리위원회는 월드비전에서 진행하는 아동 권리 옹호 사업 중 하나예요. 전국의 월드비전 복지관에서 그 지역의 특성에 맞게 자율적으로 아동을 모집하죠. 춘천종합사회복지관의 경우 춘천중학교 2학년을 대상으로 동아리 형태로 운영하며, 최대 2년 동안 활동할 수 있어요. 매년 새로운 구성원을 뽑을 때마다 경쟁률이 엄청나답니다.
효빈: 아동 권리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9명의 학생이 모였죠. 어떻게 하면 우리 힘으로 아동 권리를 외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고 있어요.  
춘천 아동권리위에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경민: 평소 사회에 도움이 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단체에서 활동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마침 춘천 아동권리위 모집 공고를 봤고, 좋은 기회를 잡아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수현: 저도 비슷해요. 처음에는 교내 봉사동아리에서 활동했는데, 이후 학교와 연계한 아동권리위가 있다는 걸 알고 관심이 생겨 지원했죠.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림도 직접 그렸다. 채색에 한창인 두 학생의 모습.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림도 직접 그렸다. 채색에 한창인 두 학생의 모습.

책 『토끼왕』을 발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김: 7~8년 동안 아동권리위 담당자로 일하며 아동 권리 보장을 위해 정책 제안을 하는 등 많은 시도를 했어요. 하지만 피부에 와 닿는 실질적인 변화는 얼마 없더라고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죠. 춘천이 원래 애니메이션으로 유명하잖아요. 지역 특성도 살리고, 우리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이 봤으면 하는 마음에 동화책을 만들게 됐어요. 아동권리위 친구들과 대화하다 보니 교육 당사자인 우리가 왜 교육감·선생님 등을 뽑을 수 없냐는 목소리가 나왔고, 청소년 참정권에 대한 내용을 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죠. ‘토끼왕’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힘·권력을 쥔 어른들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권리를 박탈당하는 아동들의 사례를 묘사했어요. 교육의 주체자이지만 아직도 직접 교육감을 뽑을 권리가 없고, 이로 인해 아동·청소년이 진짜로 원하는 교육·정책이 실현되지 못하는 현실 같은 것들이요. 동화를 매개로 사회에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전달하고 싶었어요.  
대통령·교육감 투표에 참여하고 싶은가요.
효빈: 교육 당사자는 저희잖아요. 청소년의 문제인 만큼 같이 고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채린: 사실 아주 어린 영유아·초등학생은 투표하기 힘든 게 현실이죠. 직접적인 선거권은 없더라도 아동에게 정치가 왜 중요한지, 투표·선거·참정권 등에 대해 충분히 교육하고 알려줬으면 좋겠어요.
『토끼왕』 발간 프로젝트에 함께한 월드비전 춘천종합사회복지관 아동권리위원회 김기호 과장(맨 왼쪽 사진)과 김효빈(가운데 사진)·성수호 학생.

『토끼왕』 발간 프로젝트에 함께한 월드비전 춘천종합사회복지관 아동권리위원회 김기호 과장(맨 왼쪽 사진)과 김효빈(가운데 사진)·성수호 학생.

동화책 『토끼왕』은 약 9개월간 20번이 넘는 회의를 거친 끝에 탄생했다. 의견을 내는 은수현(왼쪽 사진)·최성현 학생.

동화책 『토끼왕』은 약 9개월간 20번이 넘는 회의를 거친 끝에 탄생했다. 의견을 내는 은수현(왼쪽 사진)·최성현 학생.

이야기·그림 모두 직접 제작했는데, 힘들진 않았나요.
김: 20번 넘게 모였던 것 같아요. 스토리·삽화팀으로 나눠 진행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4명 이상 모일 수 없는 고충도 있었죠.
효빈: 팀장으로서 모두의 생각과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게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서로 웃으며 열정적으로 일했어요.
경민: 동화책을 만들며 아동 권리에 대해 더 깊게 알게 됐는데, 막상 실제 경험을 스토리로 연결하려니 막막하더라고요. 하교 후 친구들과 이것저것 이야기하며 고민도 털어놓고 토론했던 추억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수현: 채색하던 중 음료수를 엎어 처음부터 다시 그렸던 일이 기억나요(웃음). 그래도 모든 과정이 의미 있고 재미있었어요.
책이 발간됐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요.
혁주: 제가 중요한 사람이 된 느낌이 들었어요.
수호: 저희 같은 아동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것 같아 좋았어요.
채린: 책을 만들기까지 1년 가까이 걸렸는데, 가장 처음 든 느낌은 ‘후련하다’였어요. 우리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실제 책으로 나오니 신기하기도 했고요.
다윤: 이 책을 통해 아동 권리가 조금이나마 더 보장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성현: 아동 권리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이 이 책을 한 번쯤 읽어보면 좋겠어요.  
김: 아이들과 함께한 입장에서 아주 뜻깊은 일이죠. 처음에는 우리끼리 간직하자는 생각으로 50부만 만들려 했는데, 책을 본 출판사에서 계약을 제안하더라고요. 현재 1000부까지 찍은 상황입니다. 놀랍고 뿌듯해요.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토끼왕’과 권리를 박탈당한 동물들.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토끼왕’과 권리를 박탈당한 동물들.

토끼왕 캐릭터가 만들어지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경민: 사람에게 친숙한 동물을 메인 캐릭터로 잡은 뒤 토끼왕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어요. 보통 동물의 왕이라고 하면 육식동물을 생각하는데,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초식동물인 토끼를 왕으고 제안했고, 다들 동의했죠.
어떤 사람들이 이 책을 많이 봤으면 싶은가요.
래현: 어른들이요. 청소년뿐 아니라 토끼왕 같은 어른들을 위한 책이기도 하거든요. 『어린 왕자』도 어른이 읽었을 때 그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오는 것처럼, 저희가 함축적으로 담은 의미·내용이 어른에게 더 잘 전달될 것 같아요.
각자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나 내용이 있다면요.
성현: 마지막에 토끼왕이 잘못을 인정하는 부분이 가장 좋아요. 아동 권리에 대해 안일하게 생각했던 어른들이 이 부분을 보고 반성했으면 좋겠어요.
수현·래현·혁주: “그래, 힘이 있다고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러서는 안 돼. 서로의 권리를 지켜주고 존중할 때가 가장 행복한 거야. 다시 왕국을 만들어보자!”라는 대사요. 힘이 센 어른이라고 해서 권력을 남용하거나 아동의 권리를 박탈할 권리는 없다는 메시지를 담았는데, 가장 강조하고 싶었던 내용이죠.
수호: 토끼왕이 잘못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하 감옥에 갇힌 동물들이 묵인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때로 잘못된 대우를 받고도 잘못됐다고 당당히 말할 수 없는 아동·청소년의 모습이 생각났어요.
2020년에는 춘천중 학생에게 코로나19 예방 키트를 전달하는 ‘코로나19 캠페인’을 펼쳤다.

2020년에는 춘천중 학생에게 코로나19 예방 키트를 전달하는 ‘코로나19 캠페인’을 펼쳤다.

캠페인에 앞서 코로나19 예방수칙을 알리는 세움 간판을 만드는 춘천 아동권리위.

캠페인에 앞서 코로나19 예방수칙을 알리는 세움 간판을 만드는 춘천 아동권리위.

2020년에도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고 들었어요.
김: 2020년에는 500명의 춘천중 학생에게 코로나19 예방키트를 전달하는 ‘코로나19 캠페인’을 펼쳤죠. 또, ‘사랑하고 사랑받을 권리’라는 주제로 ‘소원 팔찌 캠페인’을 진행하기도 했어요(9명 모두 팔을 내밀며: 이게 소원 팔찌예요!). 학생들이 이뤄졌으면 하는 소원을 적어 소원함에 넣으면, 해당 학생이 적은 소원 카드와 함께 소원 팔찌·간식을 나눠줬어요.
수현: 소원 팔찌 캠페인은 경민이의 아이디어로 진행하게 된 프로젝트인데, 진지하게 소원을 적는 친구들·선생님을 보며 진심으로 그들의 소원이 이뤄지길 바라게 되더라고요. 코로나19로 힘든 상황에 작은 희망이라도 전달할 수 있어 뿌듯했어요.
소원 팔찌 캠페인’은 소원을 적어 소원함에 넣으면 소원 팔찌·카드·간식을 나눠주는 프로젝트다.

소원 팔찌 캠페인’은 소원을 적어 소원함에 넣으면 소원 팔찌·카드·간식을 나눠주는 프로젝트다.

‘소원 팔찌 캠페인’에 참석한 춘천중 학생이 소원 팔찌를 살펴보고 있다.

‘소원 팔찌 캠페인’에 참석한 춘천중 학생이 소원 팔찌를 살펴보고 있다.

스쿨존 점멸 신호등을 안전한 숫자 신호등으로 바꾸는 데도 한몫했다고요.
김: 2011년 춘천 한 스쿨존에서 등교 시간에 교통사고가 난 적이 있어요. 춘천 시민 모두 충격을 받을 정도로 큰 사고였죠. ‘민식이법’이 제정되기 전이었는데, 춘천 아동권리위와 지역 모니터링단이 협력해 춘천 내 학교 주변 교통현황을 모니터링하기 시작했어요. 그 결과 3개 초·중학교가 모인 밀집 지역의 보행자 신호등 시간이 너무 짧고, 언제 꺼질지 모르는 점멸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죠. 급하게 뛰는 아이들의 모습에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랜 기간 모니터링한 내용을 들고 춘천시청 교통과에 찾아갔죠. 원래는 예산도 따로 배정되지 않았고, 2차선이라 숫자 신호등을 설치하는 건 어렵다고 했어요. 하지만 아이들이 모니터링한 내용을 검토한 시청에서 이듬해 이례적으로 해당 지역의 신호등 4개를 모두 숫자 신호등으로 바꿨죠. 불법 주정차 감시 카메라도 함께 설치했고요.
수현: 이후 2020년부터 다시 스쿨존 모니터링을 이어왔어요. 2개 그룹으로 나눠 학교 또는 학교 주변에서 우리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위협하는 요소가 있는지 토의했는데, 신호등이라는 결론이 나왔죠. 스쿨존 주변을 모두 점검하고 의결문을 작성해 춘천시청에 제출했어요.
월드비전 아동권리위원회는 권리의 주체인 아동이 자신의 힘으로 아동 권리를 외치고 존중받을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앞으로도 여러 활동을 이어갈 예정이다.

월드비전 아동권리위원회는 권리의 주체인 아동이 자신의 힘으로 아동 권리를 외치고 존중받을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앞으로도 여러 활동을 이어갈 예정이다.

김 과장에게 “춘천 아동권리위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 묻자 “꿈을 가질 기회를 열어주고 싶다”는 답이 돌아왔죠.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너는 꿈이 뭐야?’ ‘뭐가 되고 싶어?’거든요. 그런데 대부분 ‘모르겠다’고 해요. 꿈을 가지고 펼칠 수 있는 것도 아동의 권리인데, 속상하고 마음 아프죠. 어른이자 지도자로서 아이들이 마음껏 꿈꿀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목표예요.”

마지막으로 춘천 아동권리위 학생들이 소중 독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어요. “청소년 여러분, 지금 당장은 힘들고 지치겠지만, 꿈과 희망을 가지고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행복한 삶이 우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효빈).” “‘나이가 어리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이다’라는 이유로 우리의 권리를 침해하는 건 정당하지 못해요. 우리는 아동권리협약의 4대 권리인 생존권·보호권·발달권·참여권을 보장받는 하나의 주체라는 사실, 잊지 마세요!(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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