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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코 한 코 뜨개질 90세 현역 “인형 옷 맞춤집 열고싶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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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1호 19면

니트 인형 옷 작가 서윤남 

90세의 니트 인형 옷 작가 서윤남씨와 딸 최우현씨, 손녀 윤보민씨. 서씨가 손에 든 검정·핑크 옷 인형은 드라마 ‘펜트하우스’에 등장했다. 전민규 기자

90세의 니트 인형 옷 작가 서윤남씨와 딸 최우현씨, 손녀 윤보민씨. 서씨가 손에 든 검정·핑크 옷 인형은 드라마 ‘펜트하우스’에 등장했다. 전민규 기자

“보석보다 인형 살 때가 더 행복해요.”

올해 90세를 맞은 니트 인형 옷 작가 서윤남씨의 말이다. 서씨는 코바늘 뜨개질로 인형 옷을 만든다. 바비 인형부터 도자기 인형까지, 남자·여자·아이인형 등 종류도 다양하다. 20대 후반부터 만들어온 인형 옷이 수천 벌. 10년 전부터는 1년에 한 번 전시도 연다. 9회째를 맞는 올해 전시 ‘THE 9TH EXHIBITION SEO YOON NAM’은 지난 11일부터 17일까지 롯데월드타워 아트갤러리카페 ‘어바웃’에서 열리고 있다.

‘펜트 하우스’ 작가가 인형 부탁

서윤남 작가의 인형 옷들은 화려한 색감과 섬세한 디테일이 특징이다. 구슬 장식품 하나까지 서씨가 직접 만든다. [사진 서윤남]

서윤남 작가의 인형 옷들은 화려한 색감과 섬세한 디테일이 특징이다. 구슬 장식품 하나까지 서씨가 직접 만든다. [사진 서윤남]

90세 현역 작가의 전시라는 점도 화제지만 90세 할머니, 60세 딸, 29세 손녀까지 3대가 함께 준비한 전시라는 점도 인상적이다. 주얼리 디자이너인 딸 최우현(60)씨가 기획을 맡고, 역시 주얼리 디자이너인 손녀 윤보민(29)씨가 인형이 들어갈 액자 배경 제작을 맡았다. 어쩌면 전시제목으로 ‘90·60·30’도 어울렸을 것 같다.

서씨가 만든 인형 옷들은 화려한 색감이 특징이다. 수백 개의 인형을 모아놓은 전시장에는 온 세상에 존재하는 색이란 색은 다 모인 듯하다.

“디자인 밑그림을 그리고 시작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한 코 한 코 뜨다가 이 색실을 넣어볼까, 리본을 붙일까,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대로 만들죠.”(서)

서윤남 작가의 인형 옷들은 화려한 색감과 섬세한 디테일이 특징이다. 구슬 장식품 하나까지 서씨가 직접 만든다. [사진 서윤남]

서윤남 작가의 인형 옷들은 화려한 색감과 섬세한 디테일이 특징이다. 구슬 장식품 하나까지 서씨가 직접 만든다. [사진 서윤남]

즉흥적인 조합이라고 하지만 서씨의 인형 옷들에는 분명한 개성이 살아 있다. 예를 들어 서씨가 새로 해 입힌 옷을 보면 어느 나라 인형인지 쉽게 알아맞힐 수 있다. 국가별 고유 색상과 특징이 옷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밀라노에서 열렸던 ‘한국의 밤’ 전시를 위해 한복을 만들 때가 제일 신났었죠. 저고리와 치마 끝단에 들어갈 예쁜 색동을 위해 색깔을 원 없이 조합할 수 있었으니까요.”(서)

서윤남 작가의 인형 옷들은 화려한 색감과 섬세한 디테일이 특징이다. 구슬 장식품 하나까지 서씨가 직접 만든다. [사진 서윤남]

서윤남 작가의 인형 옷들은 화려한 색감과 섬세한 디테일이 특징이다. 구슬 장식품 하나까지 서씨가 직접 만든다. [사진 서윤남]

서씨의 인형 옷이 또 특별한 이유는 섬세함 때문이다. 서씨는 “인형이라도 옷태가 나려면 속옷부터 잘 챙겨 입어야 한다”며 흰색 실로 팬티·속바지·속치마까지 떠서 입힌다. 아기 인형들이 새끼손톱보다 작은 팬티를 입은 모습을 보면 “귀여워!”라는 환호성이 절로 터진다. 바비 인형의 드레스와 한복 치맛자락이 자연스레 퍼지는 것도 속바지와 속치마 덕분이다. 서씨는 나일론으로 만든 인형 머리카락이 붕붕 뜨는 게 눈에 들어온 날이면 잠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헤어밴드를 뜬다. 침대 주변이 온통 실 천지인 이유다. 덕분에 서씨의 인형들은 언제나 고급스럽고 우아한 모습이다. 딸과 손녀가 주얼리 디자이너이니 인형이 걸친 목걸이 등의 액세서리는 도움을 받을까 생각했지만 이 또한 서씨가 직접 만든단다.

“어머니는 완벽주의자라 모든 걸 직접 하시죠. 눈곱만한 크기의 구슬을 실로 꿰서 목걸이를 만드시는 걸 보면 정말 믿기지가 않아요.”(최)

서윤남 작가의 인형 옷들은 화려한 색감과 섬세한 디테일이 특징이다. 구슬 장식품 하나까지 서씨가 직접 만든다. [사진 서윤남]

서윤남 작가의 인형 옷들은 화려한 색감과 섬세한 디테일이 특징이다. 구슬 장식품 하나까지 서씨가 직접 만든다. [사진 서윤남]

지난해 5월에는 SBS 드라마 ‘펜트 하우스’ 김순옥 작가의 부탁으로 특별한 인형 옷을 만들었다. 시리즈 3편에서 주인공 심수련(이지아 분)이 자신을 닮은 인형과 직접 실로 뜬 옷을 선물한다는 내용이다. 당시 배우 이지아의 헤어스타일까지 똑같이 표현하기 위해 딸 최씨가 인형을 들고 청담동의 유명 헤어숍까지 다녀왔다.

대구출신인 서씨는 대구 서문시장에서 건어물 도매상을 크게 하신 아버지와 섬유공장을 운영한 남편 덕분에 경제적 어려움 없이 지냈다. 어려서부터 좋아했던 뜨개질은 한가하고 고급스러운 취미로만 남을 수 있었지만, 서씨는 자신의 커리어를 쌓고 싶은 신여성이었다. 서울을 오가며 편물학원에서 수학했고, 대구에서 가장 큰 ‘뉴 스타일’ 편물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면서 기능올림픽 심사위원도 역임했다. 서씨의 능력과 열정을 알아본 ‘뉴 스타일’ 원장은 후임 원장 자리를 서씨에게 맡겼다.

서윤남 작가의 인형 옷들은 화려한 색감과 섬세한 디테일이 특징이다. 구슬 장식품 하나까지 서씨가 직접 만든다. [사진 서윤남]

서윤남 작가의 인형 옷들은 화려한 색감과 섬세한 디테일이 특징이다. 구슬 장식품 하나까지 서씨가 직접 만든다. [사진 서윤남]

“평생 손톱을 기른 적도, 매니큐어를 칠해 본 적도 없어요. 매일매일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으로 내가 좋아하는 일에 열중했죠.”(서)

훈김 쏘이면 새 실, 버릴 게 없어

색동 한복을 입은 바비 인형들. [사진 서윤남]

색동 한복을 입은 바비 인형들. [사진 서윤남]

니트 인형 옷 작가로 유명세를 탄 건 8년 전 첫 전시를 열면서부터다. 2014년 허리를 다친 뒤 서씨는 두 달 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

“꼼짝 못하고 누워만 지내면서 어머니는 식욕도 기운도 잃었어요. 이대로 돌아가실까봐 겁이 덜컥 나서, 그동안 미뤄왔던 어머니의 전시를 준비했죠.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엄마, 가을에 전시회를 열 거예요’ 한마디에 태엽을 다시 감은 인형처럼 기운을 차리시더라고요. 전시를 위해 새로 옷을 만들겠다고.(웃음) 손을 많이 움직이고, 매일 집중할 수 있는 취미가 있으면 치매 예방에 좋다고 하잖아요. 우리 어머니도, 관람객도 긍정의 에너지를 받았으면 좋겠어요.”(최)

어려서부터 할머니가 떠준 옷을 입고 자란 손녀 보민씨까지 힘을 보태면서 올해 전시 준비는 더욱 활기를 띄었다.

“할머니가 만들어준 스웨터·원피스를 입고 다닐 때마다 친구들이 참 부러워했어요. 색감이랑 디자인도 세련됐고, 세상에 딱 하나밖에 없는 오뜨 쿠뛰르(고급 맞춤복) 옷이니까요.”(윤)

요즘처럼 쉽게 사고, 쉽게 버리는 세상에서 서씨의 작업 방식은 울림이 크다. 서씨는 요즘 유행하는 ‘제로 웨이스트(쓰레기를 줄이자)’ 캠페인을 60년 먼저 시작했다.

“뜨개실이 좋은 건 오래된 실도 주전자에서 나오는 뜨거운 김을 쏘이면 새 실이 된다는 점이죠. 그걸로 또 예쁜 새 옷을 만드니까 버릴 게 하나도 없어요.”

서씨의 인형 옷이 유난히 색감이 화려한 것도 자투리 실을 버리지 않고 다른 실과 연결해 쓰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10시간 넘게 인형 옷을 만들어요. 등이 굽고, 팔꿈치도 아프죠. 하지만 새로운 꿈 때문에 늘 즐거워요. 2평짜리 가게를 하나 열고 ‘인형옷 맞춤집’을 하는 거예요. 누구라도 인형을 갖고 온 손님이 원하는 옷을 말하면 내가 그대로 만들어주는 거죠. 어때요, 참 신나겠죠?”(웃음)

아이들은 인형을 통해 저마다 상상의 나래를 편다. 90세 할머니 작가는 그 상상의 날개마다 예쁜 옷을 입혀주는 게 꿈이란다. 그래서 아이와 노인의 순수함은 통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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