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이사제, ESG 업고 민간기업까지? 노노갈등·공공개혁 어쩌나 [뉴스분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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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인근에서 열린 '한국노총 공공노동자 총력투쟁 결의대회'에 참가한 조합원들이 노동이사제 쟁취 문구가 써있는 피켓을 들고 있다. [뉴시스]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인근에서 열린 '한국노총 공공노동자 총력투쟁 결의대회'에 참가한 조합원들이 노동이사제 쟁취 문구가 써있는 피켓을 들고 있다. [뉴시스]

노동이사제가 법으로 강제 시행된다. 공공부문에 한정된다고 하지만 향후 산업현장에 미칠 파장은 만만찮을 전망이다. 법체계 상 노사 간 힘의 균형을 표방하던 산업현장에 노조 쏠림 현상이 가속화할 수 있다.

현행 한국의 노동 관련 법 체계는 노사 교섭과 노사협의회라는 중층적 구조다. 노사교섭은 임금·단체협상을 통해 근로조건을 향상하기 위한 노사 간 협상 과정이다. 노사협의회의는 경영자 위원과 노동자위원으로 꾸려진다. 노사협의회에선 ▶경영 사안 보고 ▶협의 ▶의결 등을 수행한다. '근로자 참여 및 협력증진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이 세 가지는 의무 사항이다. 근로자의 경영 참여가 제도로 보장되어 있는 셈이다. 익명을 요구한 전 고용노동부 고위 관계자는 "노조 활동과 경영 활동의 독립적 운용을 보장하면서, 노사협의회로 두 활동을 자율적으로 조율·조정한 뒤 의결까지 하는 강력한 이중구조 체계"라고 말했다.

한데 여기에 노동이사제라는 제도가 산업현장에 얹어졌다. 경영 활동 최일선에 노동계가 진출하면서 경영 활동의 독립적 운용만 개방되는 결과가 됐다. 노사 간 힘의 불균형 심화, 노조로의 편향적 기울기라는 분석은 그래서 나온다.

노동이사제가 법제화했지만 우려와 과제는 많다. 하나하나가 모두 시행 과정에서 쟁점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 이를 둘러싼 갈등이 심화할 수도 있다.

①민간 기업 확산 가능성은

경영계는 공공부문 노동이사제가 민간으로 확산할 것을 가장 우려한다. 시장경제와 주주 자본주의에 기반을 둔 경제체제에서 사회주의 자본주의에서 운용되는 노동이사제가 민간으로 확산하면 경영의 기본 질서가 흔들리게 된다는 판단이다. 당장 민주노총 사무금융노조는 공공부문 노동이사제가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마자 "민간 금융회사에 확대 시행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물길을 터 준 이상 이런 요구가 확산할 것은 불문가지다.

이걸 막겠다고 나서는 경영계는 무기력하다. 정치권의 융단폭격에 의욕을 잃은 탓도 있지만, 경영계 스스로 발목을 잡은 측면도 있다. 노동이사제가 수면 위로 급부상한 것은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필두로 각 기업이 ESG(환경·사회적 책임·지배구조 개선) 경영을 화두로 삼으면서다. 노동이사제는 G(지배구조 개선)와 맞물려 있다. 경영계 스스로 다짐한 터라 노동이사제와 관련해선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노동계는 이 틈새를 파고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12일 참모회의에서 "노동이사제는 경영문화를 바꾸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민간 기업으로의 확산이 시간문제라는 경제·경영학자들의 우려(한국경영자총협회 조사, 90%)가 기우가 아닐 수 있다.

손경식 경영자총협회 회장이 지난달 20일 국회 더불어민주당 대표실에서 송영길 대표를 만나고 있다.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과 국회를 찾은 손 회장은 공공부문 노동이사제 도입 입법 중단 등을 요청했다. 임현동 기자

손경식 경영자총협회 회장이 지난달 20일 국회 더불어민주당 대표실에서 송영길 대표를 만나고 있다.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과 국회를 찾은 손 회장은 공공부문 노동이사제 도입 입법 중단 등을 요청했다. 임현동 기자

②노조 영향력 확장과 노노 갈등

노동이사는 노조의 추천이나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받은 사람으로 선임하게 돼 있다. 공공부문 노조 조직률이 69.3%에 달하는 점을 고려하면 노조가 사실상 노동이사 선임권을 좌지우지할 가능성이 짙다. 노조의 영향력은 커질 수밖에 없다. 물론 노조원이 아닌 근로자 전체 투표로 정할 수도 있지만, 조직률이 높은 노조가 받아들일지는 의문이다.

선임 과정을 놓고 넘어야 할 난제도 한두가지가 아니다. 상당수 공공기관은 복수노조 체제다. 어느 노조에서 노동이사를 배출할 것인지를 두고 노조 간 다툼이 일 수 있다. 과반수 노조에서 노동이사를 배출한다고 하더라도 소수노조와의 이해관계 조율이 어려울 수 있다. 노동이사 선임뿐 아니라 업무 수행과정에서도 갈등이 표출될 수 있다는 얘기다.

특히 노조 집행부가 바뀌면 노조 내부 경선이나 추천을 통해 선임된 노동이사라고 하더라도 신·구 집행부 간의 이해관계나 견해차이로 임원으로서의 위상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노동이사 임기와 노조 집행부 선거 주기가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이런 현상이 비일비재할 수 있다. 이로 인한 혼란을 어떻게 처리할지도 숙제다.

③근로자 대표와 경영 이사 사이 위상 정립
일각에선 노조위원장이 노동이사로 선임될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는다. 하지만 노조의 운영 구조나 노동이사의 성격상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노동이사는 이사회에서 경영 관련 정보를 얻게 된다. 다른 이사회 참석자와 마찬가지로 비밀 유지 의무가 주어진다. 노조위원장이 회사의 경영 비밀을 누설한다는 위험에 노출되면서까지 이사직을 겸직할 가능성이 낮은 이유다.

무엇보다 개정된 법에 따라 노동이사는 1명 이상이지만 사실상 1명으로 제한될 전망이다. 직위도 비상임이다. 그래서 자칫하면 들러리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더욱이 노동이사는 평소에는 일을 하는 직원 또는 노조 간부이면서 이사회에선 임원으로 활동하는 이중적 정체성을 가진다. 두 정체성 간의 혼란을 노동이사가 감내해야 한다. 이는 회사는 물론 노조와도 불가근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의 관계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한국노동연구원이 서울시 산하 노동이사를 조사한 결과 "이사회 관련 안건에 대한 정보를 (회사에) 요청하거나 평소에 미리 준비하고자 정보 열람을 요청해도 노동이사가 아니라 직원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 바라보며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회사는 이사회 참여자가 아니라 또 다른 노조 대표처럼 인식한다" "오랫동안 노조 활동을 하다 노동이사가 됐는데, 노조 사무실을 찾아가면 내가 나타나자마자 모두 말을 멈추고 회의자료를 다 치우더라"고 말했다.

2020년 1월 3일 오전 서울 중구 IBK기업은행 본점에서 윤종원 신임 IBK기업은행장이 첫 출근 중 노조원들의 출근 저지 투쟁에 가로막혔다. 기업은행 노조는 윤 신임 행장에 대해 '은행업 경력이 전무한 낙하산 인사'라며 '출근 저지 투쟁과 파업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뉴스1

2020년 1월 3일 오전 서울 중구 IBK기업은행 본점에서 윤종원 신임 IBK기업은행장이 첫 출근 중 노조원들의 출근 저지 투쟁에 가로막혔다. 기업은행 노조는 윤 신임 행장에 대해 '은행업 경력이 전무한 낙하산 인사'라며 '출근 저지 투쟁과 파업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뉴스1

④낙하산 인사 방지 효과와 인사권 침해 논란

노동이사제의 장점 중 하나로 꼽는 것이 낙하산 인사 방지다. 노조가 물리력으로 출근을 막는 등의 실력행사에 더해 이사회에서 강력하게 주장하면 낙하산 인사를 제어하는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반면 이게 인사권 침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 문제로 꼽힌다. 노조에 우호적이거나 노조가 추천하는 사람을 선임하도록 압력을 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전문성은 뒷전이고, 노조의 마음에 안 맞으면 반대하는 형태로 인사에 개입할 수 있다. "공공부문에서 노조가 인사를 좌지우지하는 현상은 비일비재하다. 경영진은 갈등으로 비화하지 않으려 비위를 맞추는 현상도 많이 나타난다. 이런 상황에서 인사에 개입하면 공공기관이 막을 방법이 있을지 의문"(전 고용부 고위관계자)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까닭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낙하산 인사에게 지급된 금액 상위 10위 기관.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낙하산 인사에게 지급된 금액 상위 10위 기관.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⑤공공부문 구조개혁은

공기업치고 막대한 부채를 떠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경영 사정이 안 좋다. 직원들은 민간기업보다 임금 등 높은 수준의 근로조건을 누린다. 경총 조사에서 경제·경영학자들이 "노동이사제가 공기업의 도덕적 해이와 방만 경영 가능성을 높인다"고 한 건 이 때문이다. 사실상 노동이사제가 공공부문 개혁의 대못으로 변질할 수 있다는 우려다. 익명을 요구한 공공기관 관계자는 "공공부문 개혁은 사실상 난항 또는 좌초할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는 "노조가 파업과 같은 단체행동으로 막아서고, 이사회에서 목소리를 높이면 개혁 작업에 진척이 있겠는가"라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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