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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 물러가라" 카자흐 피흘리며 일어났다…잔혹한 30년 독재

중앙일보

입력

카자흐스탄을 약 30년간 통치한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 2019년 조기 퇴진 이후에도 국가안보회의 의장을 맡아 국가 지도자를 자처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카자흐스탄을 약 30년간 통치한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 2019년 조기 퇴진 이후에도 국가안보회의 의장을 맡아 국가 지도자를 자처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영감은 물러가라.”
수천 명이 체포되고 최소 50명의 사상자가 나온 카자흐스탄의 반정부 시위는 연료 가격 급등에서 촉발됐지만, 시위대에선 이런 구호가 나왔다. 지난 2019년 퇴임한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82) 전 대통령을 시위대가 다시 소환했다. 현지에선 나자르바예프가 세 딸을 데리고 이미 해외로 도피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나자르바예프는 소비에트연방공화국(소련) 해체 직전인 1990년부터 2019년까지 29년간 카자흐스탄을 통치한 독재자다. 그의 동상이 제1의 도시 알마티와 수도 누르술탄을 비롯한 나라 전역에 세워져 있다. 외신에선 이번 시위를 놓곤 장기 독재의 피로감이 누적된 상황에서 팬데믹으로 인한 경제난이 겹쳐 에너지 가격 급등을 계기로 폭발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30년 집권…제1야당 해산

2019년 4월 조기 퇴진과 함께 최측근인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왼쪽)에게 권력을 이양한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 AFP=연합뉴스

2019년 4월 조기 퇴진과 함께 최측근인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왼쪽)에게 권력을 이양한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 AFP=연합뉴스

철강 노동자였던 나자르바예프는 1962년 소련 공산당에 가입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1984년 카자흐스탄 각료회의 의장과 1989년 최고통치자인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를 지냈고, 1990년 카자흐스탄이 소련에서 독립한 뒤 치러진 첫 대선에 단독 출마해 당선했다. 여느 독재자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부정선거와 야당 탄압, 비리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재선(1999년 81%) 때를 제외하고 모든 선거에서 90%대 압도적인 득표율을 기록한 그는 2005년 정부 전복 혐의로 제1 야당 ‘민주선택당’을 해산시켰다. 런던에 1억800만 달러(약 1300억원) 규모의 부동산도 보유하고 있다.

그의 비리 의혹은 가족 내부에서도 튀어나왔다. 장녀인 다리가 나자르바예바(59)의 남편인 라하트 알리예프가 장인인 나자르바예프의 비리를 폭로하면서다. 야당 인사들을 고문하거나 죽이고, 수조 달러에 달하는 비자금을 해외로 빼돌렸다는 내용이다. 카자흐스탄 첩보기관과 외무부 등을 거쳐 오스트리아 대사를 지낸 그는 2007년 강제 이혼당하고 오스트리아로 몸을 피한 상태에서 궐석 재판을 통해 정부 전복 혐의로 징역 40년형을 받았다. 오스트리아에서 횡령과 살인 등 혐의로 재판을 받던 지난 2015년 구치소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손자인 아이술탄 나자르바예프도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정부 간 대규모 비리에 관한 정보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영국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카자흐스탄 국방부 총정찰국에서 근무했던 그는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압력을 행사한다며 2020년 2월 영국 정부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지만, 6개월 만에 30살 생일을 앞두고 런던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아이술탄의 어머니이자 나자르바예프의 장녀인 다리가는 2020년 5월 상원의장(국가서열 2위)에서 돌연 해임됐다.

후임 대통령에 최측근 보좌관 

6일(현지시간) 카자흐스탄 시위대가 30년 독재자인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의 동상을 철거하고 있다. [트위터 캡처]

6일(현지시간) 카자흐스탄 시위대가 30년 독재자인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의 동상을 철거하고 있다. [트위터 캡처]
6일(현지시간) 카자흐스탄 시위대가 30년 독재자인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의 동상을 철거하고 있다. [트위터 캡처]
6일(현지시간) 카자흐스탄 시위대가 30년 독재자인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의 동상을 철거하고 있다. [트위터 캡처]

나자르바예프는 재직 당시부터 사실상 종신 대통령의 길을 닦아놓고 있었다. 2010년엔 그가 퇴임 후에도 국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면책특권을 부여하는 국가지도자법 제정을 주도해 의회에서 통과시켰고, 2017년 4월엔 대통령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헌법 개정을 주도했다. 그가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를 염두에 둔 사전 조치였다. 그는 후임 대통령을 자신의 보좌관 출신인 최측근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를 내세웠다. 2019년 3월 스스로 조기 퇴임한 이후엔 국가안보회의(NSC) 의장을 맡아 ‘국가 지도자’를 자처했다. 토카예프 대통령은 지난 5일 시위가 격화하자 결국 나자르바예프를 NSC 의장직에서 해임했다. 정치적 뒷배인 나자르바예프를 안고 가기엔 국정 운영의 부담이 너무 컸던 만큼 일단 선긋기로 움직였다.

뉴욕타임스(NYT)는 7일(현지시간) 카자흐 사태를 놓고 ‘스트롱맨의 딜레마’라고 분석했다. “독재자는 정치 시스템의 무력화를 통해 자신을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만들지만, 경쟁자 없는 후계자를 세우더라도 새 정부는 강력한 정치 시스템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다. NYT는 “스트롱맨의 권력 계승은 실현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고 평가했다. 독재가 끝나면 그 국가는 곧 무너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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