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40억 환수했더니 "중요자료 아냐"…공익신고 포상소송 빈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6일 국민권익위원회는 공익 신고자에 대한 보상과 지원이 실질적으로 이뤄지도록 하겠다며 올해의 '중점 추진 과제'로 꼽았다. 큰 불이익을 감수하고 내부 자료를 수사기관에 넘기는 공익 신고자들에게 정부가 충분하게 보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권익위 등 국가 기관들이 보상 요건을 엄격하게 판단하면서 공익 신고자와 정부 간 법정 다툼이 끊이지 않고 있다. 법정에 선 정부 기관들은 “해당 신고가 중요한 자료가 아니었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중요한 자료’라는 입증 책임은 오롯이 공익 신고자의 몫이다.

컷 법원

컷 법원

수십억 환수 끌어냈는데…“중요 자료 아니었다”

요양병원에서 근무하던 A씨는 병원의 오랜 비리를 포착한 뒤 내부 자료를 모아 지난 2014년 권익위에 신고했다. A씨의 제보는 수사로도 이어졌다. 병원 운영진이 요양급여를 부정으로 수급하고, 무자격자가 의약품을 조제하는 등의 혐의가 재판에서도 인정됐다. 건강보험공단도 40억원을 환수 조치했다.

환수에 따라 A 씨는 2016년 권익위에 보상금을 신청했지만, 당시 담당자는 “법적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았다”며 이를 반려했다. 병원 운영진이 헌법소원을 청구해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A 씨는 2018년과 2019년 다시 한번 보상을 신청했지만, 2020년 권익위는 “너무 늦었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환수가 이뤄진 뒤 2년 안에 보상금을 신청해야 하는데, 그 기간이 지났다는 취지다.

권익위 측은 또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이미 해당 병원을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고와 환수 간에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다”라고도 주장했다. A씨는 소송에 나섰다. 신고 기간에 맞춰 보상금을 신청했는데도 담당자가 반려했던 점, A씨의 내밀한 자료가 아니었다면 실제 수사로 이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 등을 들었다.

하지만 7일 서울행정법원 행정1부(안종화 부장판사)가 심리한 첫 변론 기일에서 권익위 측은 “중요한 자료가 아니었다”는 취지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게다가 과거 담당자가 A 씨의 보상금 신청을 반려했다는 건 사실이 아니라며 말을 바꿨다. A씨 측은 녹취록과 헌법소원 청구 사실 등을 들어 반박하겠다고 했다.

A씨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권익위를 제외한 모든 기관이 공익 신고로 수사가 시작됐다고 하는데, 권익위만 부인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재판장도 “나라도 제보 안 한다” 

공익 신고자들의 신고 가치를 깎아내리는 건 권익위뿐 아니다. 지난 2019년 롯데 칠성의 수백억 원대 탈세 의혹을 제보한 공익신고자 B씨는 국세청이 탈세 제보 포상금을 지급하지 않아 소송 중이다. 지난해 10월 서울행정법원 행정7부(김국현 수석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첫 변론에서 국세청 역시 “중요 자료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반복했다. B씨 측은 “B씨가 제공한 각종 거래 내용 등으로 국세청이 세무조사에 착수하지 않았느냐”며 판단 이유를 국세청이 제시하라고 반박했다.

재판장도 국세청 측의 태도를 지적했다. “포상 제도를 둔 이유가 뭐냐”고 되물으며 “이런 식이면 누가 제보하겠냐, 나라도 제보 안 하겠다”고 했다. 무조건 중요한 자료가 아니라고 할 게 아니라, 왜 그런 판단을 했는지 공익 신고자에게 최소한의 설명이라도 해야 했다는 취지다.

또 국세청이 B씨로부터 도움을 받은 만큼, 최소한의 노력의 대가를 인정했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사람들을 후히 대해줘야 그다음 자료도 계속 나올 게 아니냐”라고도 덧붙였다. 재판부는 포상 제도가 어떻게 운용되는지를 고려해 향후 심리에 참고하겠다고 했다.

국민권익위원회가 지난해 9월30일 세종시 어진동 정부세종컨벤션센터에서 '공익신고자 보호법' 시행 10주년 기념 공개 토론회를 갖고 있다. 뉴스1

국민권익위원회가 지난해 9월30일 세종시 어진동 정부세종컨벤션센터에서 '공익신고자 보호법' 시행 10주년 기념 공개 토론회를 갖고 있다. 뉴스1

대법원 판례 “공익신고자가 중요성 입증해야”

권익위와 국세청이 이런 입장을 보이는 건, 공익 신고자들이 자신의 신고 내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스스로 입증하도록 한 대법원 판례 때문이다. 지난 2014년 대법원은 “포상금 지급 대상이 되는 ‘중요한 자료’에 해당하는지에 관한 증명 책임은 이를 주장하는 사람에게 있다”고 판시했다.

법조계에서는 이 증명 책임을 전환하거나 완화할 필요성이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최정규 변호사(원곡법률사무소)는 “국가기관이 '중요한 자료가 아니었다'라고만 답변한다면 사실상 공익 신고자가 이를 입증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탈세 제보의 경우 세무조사의 모든 과정이 비공개되다 보니, 탈세 제보자가 법정에서 얼마나 중요한 자료인지 입증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게다가 국가 기관들이 법정 다툼에서 관련 자료를 제출하는 걸 꺼리는 경우가 많아 공익 신고자들이 소송에 나서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공익신고자 A씨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신고에 나서겠냐는 질문에 “일단 잘못을 봤으니 신고에는 나서겠다”고 하면서도 “그때는 인생을 포기하고 신고하는 것”이라고 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