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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서 판문점까지… 이찬삼특파원 한달취재기(다시 가본 북한:1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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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바다처럼 넓은 천지의 웅자에 “숙연”/백두산 곳곳에 「혁명사적지」 답사대/74m 구룡폭포 “금강산 최고명소” 자랑
8월 중순 비행기를 타고 백두산 관광에 나섰다.
평양에서 소련제 신기종의 조선민항특별기가 한 시간 만에 일행을 양강도 삼지연비행장에 내려놓았다.
소련제 구형버스로 갈아타고 1시간20분간 달려 백두산 정상이 보이는 삭도장(케이블카)에 도착했다.
버스크기의 삭도차량 2대가 방문객들을 싣고 반시간도 안돼 천지까지 올라갔다.
황량한 벌판인 정상입구와는 달리 천지는 도무지 믿기지 않을 만큼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웠고 바다처럼 넓었다.
화산터였음을 확인시켜주듯 구멍이 숭숭난 돌무더기로 둘러싸인 천지는 기묘한 모양의 산봉우리들에 둘러싸여 파란 물로부터 신비한 광채를 뿜어내듯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한여름인데도 땀 한방울 흘리지 않고 너무 쉽게 해발 2천7백50m의 한반도 최고봉에 올라 『백두산 관광도 싱겁기 짝이 없구나』고 생각했으나 천지를 대하는 순간 그 웅자에 압도되어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함께 간 버스운전기사는 백두산이 1백만년 전에 화산활동에 의하여 생겨났으며 천지는 둘레가 14.4㎞,제일 깊은 곳의 수심이 3백84m라고 줄줄 외우듯 설명을 시작했다.
압록강과 두만강이 이곳에서 시작되며 연평균 기온이 영하 8.3도여서 천지는 12월초부터 다음해 6월 중순까지 얼어붙고 얼음두께가 4m까지 되기도 한다는 것.
천지에 오를 수 있는 기간은 7월에서 9월까지 3개월뿐으로 8월말부터 6월말까지는 눈비 때문에 출입을 삼가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한햇동안 2백50㎜의 눈ㆍ비가 오며 눈ㆍ비 오는 날이 평균 2백7일(7개월간)이라고 했다.
○비와 서둘러 하산
일행이 올라간 8월13일에도 천지 일대는 10분 정도 간격으로 안개에 가려 가까스로 사진을 찍었으며 끝내 비가 내려 서둘러 하산해야 했다.
『백두산에는 단너삼ㆍ만삼ㆍ오미자ㆍ들쭉 등 약용식물과 고사리ㆍ도라지ㆍ더덕ㆍ버섯 등 산나물들,그리고 1백리 안팎에 향기를 뿌린다는 백리향을 비롯,많은 향료식물이 분포되어 있다』고 백두산 명물 자랑을 시작한 버스운전기사는 『백두산 기슭의 울창한 밀림 속에는 범을 비롯하여 큰 곰ㆍ검은 곰ㆍ산달ㆍ백두산 노루ㆍ사향 노루 등 49종의 짐승들과 부엉이ㆍ들꿩 등 1백40종의 새들이 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천지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생물이 없는 것으로 알았으나 88년 7월29일 북한 조사대에 의해 산천어 등 물고기가 살고 있음이 확인됐다는 것. 북한에서는 백두산을 일컬어 「혁명의 성산」이라고 부른다.
『1930년도 후반기부터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항일무장투쟁 전략적 기지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게 밀영(비밀병영) 「해설원 여동무」의 말.
백두산 곳곳에 「혁명전적지」와 「혁명사적지」라는 이름으로 성역화된 10여개의 명소가 있는데 전국의 청년학생들이 「항일혁명투사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답사대오」라는 명칭으로 이곳까지 행군을 벌이기도 한다.
성역 가운데 사자봉 근처의 통나무 귀틀집은 『주체혁명 위업의 계승자이신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탄생하시어 항일전의 총포소리를 들으시며 성장하신 곳』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귀틀집 옆의 우뚝 솟은 봉우리에는 정일봉이라는 큰 비석이 세워져 있기도 했다.
여러 「밀영」에서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답사자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가죽장화에 군복차림을 한 여성 해설원 수십명이 이곳에 상주하며 안내를 맡았다.
「간백산 밀영」과 「백두산 밀영」은 규모가 제일 컸으며 최근 부근에서 발견됐다는 각종 「글발」들이 눈길을 끌었다.
구호나무라 불리는 노목에 새겨진 글발은 원형 유리상자에 보호돼 있었으며 『오랜 세월 풍상에 씻겨진 글귀들을 특수화학처리로 재생해 형광성 물질을 발라 뚜렷이 보이게 했다』는 설명이다.
『항일혁명투쟁시기에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과 지하혁명조직 성원들이 나무껍질을 벗기고 먹물로 쓰거나 새겼다』는 구호나무들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항일무장투쟁시기의 역사적 문헌으로 삼고 있다는 얘기였다.
「백두산 장수별 삼천리를 비친다」 「백두산에 축지법 쓰는 장수내렸다」 등 많은 구호나무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최근에 갑자기 등장했는지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몰려온 북한 젊은이들은 메모를 해가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평양 귀환길에 백두산 남동쪽 밀림지대 옛날 용암 분출에 의해 강이 막혀서 호수가 됐다는 삼지연에 들렀다. 둘레 2.5㎞,수심 3m 내외,수면의 해발높이 1천5백85m.
흘러들고 나가는 하천이 없음에도 사철 맑은 물이 고여 있는 삼지연은 기슭에 깔린 하얀 부석과 호수 가운데 나무가 우거진 섬 위에 백두산 전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삼지연은 김일성 동상과 「조국편」 「흠모편」 「진군편」으로 나뉜 초대형 조각군상들이 있어 어느 곳보다 우상화 작업이 잘된 곳이기도 하다.
○형형색색의 모습
금강산으로 향한 것은 1주일 후인 8월20일. 이른 아침 승용차편으로 평양을 출발한 일행은 원산행 고속도로를 달려 3시간만에 평안남도→황해북도→황해남도→강원도를 거쳐 마식령산맥을 넘어섰다.
안내원 여동무 박영옥 양(24)은 『마식령산맥이 삼천리 금수강산의 얼굴』이라고 했다.
힘겹게 오르막길을 올라섰던 승용차는 원산을 향해 굽이굽이 내리막길을 달렸다.
2중 철조망이 쳐진 해안선을 따라 1시간여를 내려가는 동안의 어촌 분위기는 강릉 경포대 가는 우리의 동해안 길과 비슷했다.
원산 송도원 여관에서 점심을 먹고,지난해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들렀다는 통천을 지나 강원도 고성군 온정리 삼일포에 도착한 것은 거의 해질 무렵이었다.
금강산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낸 일행은 이튿날 새벽 치마봉을 지나 삼선암,절구암,매바위,개구리바위를 거쳐 만물상에 올랐다.
천하절경인 천선대를 오르는 동안 또다른 「안내강사」 김창호 씨(42)는 금강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금강산 구역은 외금강ㆍ내금강ㆍ해금강으로 나뉘는데 강원도 통천군과 고성군을 끼고 있는 동해안까지를 외금강,고성군 온정리 일대를 내금강,삼일포에서 해금강까지를 해금강이라 부르는데 삼선암ㆍ귀면암처럼 산악세가 가파르고 남성미가 있다해서 외금강으로,산세가 완만해 여성미가 있다해서 내금강이라 부르다.
만물상을 끼고 천선대로 향하는 길목에 깎아세운 듯 가파르게 서 있는 삼선암에 제일 먼저 올랐다.
안내원 김씨는 『네 신선이 금강산을 구경왔다가 절세풍치에 놀라 이곳에서 살자고 합의봐 3개의 기암 화석으로 변했으며 변심한 한 신선이 달아나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게 된 것』이라 설명했다.
이밖에도 「한 농부가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다 범 한마리가 사슴을 잡아 먹으려는 것을 발견하고 도끼를 던진 자국이 남았다」는 절구암을 비롯,금강산은 많은 전설을 갖고 있었다.
산 아래위의 기후가 다르고 동해 바다쪽과 내륙의 날씨가 달라 한쪽에서는 비가 내릴 때 다른 한쪽에서는 폭포의 실안개가 무지개를 그리며 구름과 안개가 봉우리들과 골짜기들을 감돌아 형형각색의 모습을 연출했다.
안내원 김씨는 『금강산에는 2백36종의 식물과 96종의 고온지대 꽃이 분포돼 있고 범ㆍ곰ㆍ멧돼지ㆍ노루ㆍ승냥이ㆍ고슴도치ㆍ너구리 등 1백11종의 짐승이 살고 있다』고 소개했다.
○암벽에 찬양구호
김씨는 『금강산에는 유점사ㆍ표훈사ㆍ망향사ㆍ신계사ㆍ용암사 등 5대 절간이 있었는데 조국해방전쟁(6ㆍ25) 때 모두 파괴되고 내금강에 있는 표훈사만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이날 오후 천선대에서 하산한 일행은 집선봉ㆍ관음봉ㆍ5만물상ㆍ병풍바위를 뒤로 하고 길이 43m의 관음폭포를 돌아본 뒤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이 깃들인 옥류동 노래바위로 향했다.
옥류동 노래바위에 당도하기 전에 「선녀를 잡으러 올라간 장수 발자국」과 공작새 모습의 「비룡폭포」를 지났다.
「금강산을 지키는 아홉마리의 용이 살았다」해서 구룡폭포라 이름붙인 길이 74m의 구룡폭포는 장관이었다.
안내원은 『개성 박연폭포,설악산 대승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명폭으로 불린다는 구룡폭포는 물량이 많을 때는 최고 길이 1백20m까지 뻗어 이곳을 보지 않고는 금강산을 봤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고 자랑했다.
오후 7시 이미 어둠이 말리기 시작한 금강산 산중에서 일행은 「8명의 선녀들이 무지게를 타고 내려와 목욕을 하고 올라갔다」는 상팔담을 돌아보고 9시에 숙소로 돌아왔다.
금강산 일부지역 기암괴석 등에 김일성 부자를 찬양하는 대형 글귀를 새긴 곳이 눈에 띄었으나 백두산보다 많지 않았다.<시리즈 끝>
◎취재 후기/다 아는 사실 사람마다 다르게 대답/통일로 가는 길 상호 신뢰가 급선무
북한취재는 기간이 문제가 아니다.
북한사회의 의식구조를 먼저 파악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해도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길에서 만난 북한사람들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간단한 노임문제만 해도 제각기 다르게 설명하되,세상이 다 아는 군 복무기간도 모두가 틀리게 말한다.
북한사람들은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데 잘 훈련돼 있으며 이를 일종의 「애국행위」로 생각하고 있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 입을 통해서 진실이 담긴 기사를 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는 상당한 시간이 흘러서야 깨달았다.
그래서 북한을 말하는 목소리는 사람에 따라 다양할 수밖에 없다.
첫 방북취재 때 김일성 배지만 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던 기억이 새로웠던 것에 비해 한달 동안의 재방북 때는 담력도 다소 생기고 북한사회를 보는 눈도 얼마간 넓어졌다고 자부했으나 한계는 분명히,그리고 여전히 있었다.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서해의 남포에서 강원도 고성의 동해안 끝,그리고 평양에서 압록강 국경을 건널 때까지 참으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던 것만도 큰 수확이었다.
어느것 하나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고,어느 것 하나 안타깝지 않은 것이 없었던 북한취재 한달.
같은 핏줄이었기에 더욱 애정을 버릴 수 없는 사람들ㆍ아이들ㆍ산천들을 생각하며 우선 개인적인 연민의 정을 버릴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들이 강하고 애절하게 외치는 「조국」 「통일」 구호들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가 이젠 북쪽에서,그쪽 국가보다 더 자주 불리고 있다.
유치원ㆍ탁아소 아이들은 물론 중ㆍ고등학생들의 도보 때 행진곡으로 쓰일 만큼 북한 전역을 휩쓸고 있다.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러 통일이 된다면 누군들 마다할 일이 아니지만 북한사람들이 소리치는 통일구호와 노래,그 이면엔 『남조선이 원치 않는 통일이지만…』이라는 오해가 담겨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북한에 대한 「전반적 이해」가 미흡하듯 북한주민들이 남한을 곡해하고 있는 현상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세상이 변한 만큼 북한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으나 우리가 원하는 길로 나아가기 위해 가장 절실한 것은 서로간의 신뢰회복임을 한달간의 북한취재 결론으로 맺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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