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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정치가 망친 터키 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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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주정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단상에 서서 연설하고 있다. 그는 최근 2년간 터키 중앙은행 총재들을 네 명이나 바꿨나. [로이터=연합뉴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단상에 서서 연설하고 있다. 그는 최근 2년간 터키 중앙은행 총재들을 네 명이나 바꿨나. [로이터=연합뉴스]

물가 급등에도 금리인하 역주행

친서민 정책에 서민들 '비명' 역설

"국민은 정권의 실험 대상 아니야"

10년 전 미국·영국·브라질 등 외국 기자 10여 명과 함께 터키를 방문한 적이 있다. 열흘 간의 취재 일정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터키 경제의 활력이었다. 당시 터키는 모처럼 찾아온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제조업 중심의 성장 드라이브를 걸고 있었다.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은 여전했지만 그런대로 통제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한때는 월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대(2011년 3월)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동로마제국의 유적이 있는 이스탄불의 주요 관광지는 한국을 비롯한 외국 관광객으로 넘쳐 났다.
 하지만 최근 터키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우울한 얘기뿐이다. 물가는 폭등하고 통화가치는 폭락하면서 사실상 경제위기에 빠진 모습이다. 터키 중앙은행에 따르면 지난달 터키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전년 동월 대비)은 21.31%를 기록했다. 한국에서도 지난달 물가 상승률(3.7%)이 껑충 뛰었다고 난리를 쳤지만 터키에 비하면 '애교' 수준이다. 공식 통계가 이 정도라면 실제 터키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물가 상승률은 훨씬 심각하다고 봐야 한다.
 물가가 뛰면 금리를 올리는 게 경제학의 상식이다. 시중에 돈줄을 조여 추가적인 물가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서다. 한국은행이 지난달 추가로 기준금리를 인상한 이유다. 그런데 터키는 정반대로 움직인다. 터키 중앙은행은 지난 16일 통화정책회의에서 기준금리를 연 15%에서 14%로 내렸다. 지난 9월 이후 4개월 연속 금리인하 행진이다. 이 기간 터키의 기준금리는 4%포인트 하락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이런 나라는 터키가 유일하다.
 이럴 때 가장 바보 같은 사람은 은행 예금에 그냥 돈을 맡기는 사람이다. 한국에선 부동산 때문에 '벼락거지'가 생겼다면 터키에선 인플레이션 때문에 벼락거지가 속출한다. 벼락거지를 피하려면 서둘러 은행에서 돈을 빼내 인플레이션에서 안전한 자산으로 바꿔야 한다. 대표적인 게 달러나 유로 같은 외국 돈이다. 최근 외환시장에서 터키 리라화 가치가 폭락한 이유다. 터키 중앙은행이 다급하게 외환보유액을 풀어가며 환율 방어에 나섰지만 여전히 불안한 상황이다.
 터키 중앙은행이 이렇게 어리석은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있다. 그는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는 중앙은행 총재들을 최근 2년간 네 명이나 갈아치웠다. 경제 문제를 경제 논리로 풀 생각은 하지 않고 억지로 정치 논리를 갖다대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사회적 약자 보호를 내세운다. 금리가 높으면 서민들이 고통을 받는다는 식이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얘기다. 금리가 내려서 좋아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다수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당장 먹고 살 빵과 밀가루를 사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다. 최근 결혼한 터키의 20대 의사 부부는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하루하루 점점 가난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나라 안팎에서 비판이 쏟아지자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념을 내세운 '갈라치기'로 맞섰다. 그는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려야 한다는 건 서구 사회의 왜곡된 논리라고 주장한다. 이자를 금지하는 이슬람 율법까지 정치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그는 지난 19일 방송 연설에서 "이슬람교도로서 율법이 요구하는 걸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적 반대파에 맞서기 위해 보수주의 종교 세력의 단결을 호소하는 전략이다.
 통화가치가 하락하면 좋은 점도 없지 않다. 수출시장에서 자국 제품의 경쟁력이 강해진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계속 고집을 부리는 이유다. 그는 수출 주도 성장으로 터키를 '제2의 중국'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통화가치 하락의 '저주'와 수출 경쟁력 상승의 '축복'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다닌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때 한국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당시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데 수출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렇다고 현재의 터키에 같은 처방이 통하는 건 아니다. 수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외환위기의 고통을 자초하는 건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다.
 터키 출신 언론인 알파고 시나씨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이런 상황을 소개하면서 "(에르도안이) 자기네 정권을 위해 나라를 갖고 실험을 했다. 그래서 이 꼴이 됐다"고 한탄했다. 터키의 잘못된 선택은 한국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 주도 성장'이란 실험은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남을 것이다. 서민을 위한다는 정책이 정작 서민의 삶을 더욱 힘들게 하는 역설이다. 내년에 출범하는 새 정부에선 비슷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주정완 논설위원

주정완 논설위원

물가 급등에도 금리인하 역주행 #친서민 정책에 서민들 '비명' 역설 #"국민은 정권의 실험 대상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