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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차이나 중국읽기

후시진 퇴장과 판정웨이 등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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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지난 16일 한 중국 언론인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중국의 대표적 매파 신문인 환구시보(環球時報)의 편집인 후시진(胡錫進)이 그 주인공이다. 이날 오전 그는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微博)에 “더는 환구시보 편집인 자리를 맡지 않는다”고 밝혔다. 내년이면 62세가 되는 자신의 나이를 퇴임의 이유로 들었다. 그러자 중국 언론은 물론 서방의 유수 언론 모두 그의 편집인 사직을 기사화했다. 왜? 꽤 오랜 기간 그의 글 하나하나가 세계의 주식시장에 영향을 미칠 만큼 엄청난 영향을 끼쳐왔기 때문이다.

애국주의를 파는 중국 환구시보에서 막말과 독설로 유명세를 떨쳤던 후시진 편집인이 지난 16일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앞으로도 특약 평론가 신분으로 글을 계속 쓰겠다고 한다. [중국 바이두 캡처]

애국주의를 파는 중국 환구시보에서 막말과 독설로 유명세를 떨쳤던 후시진 편집인이 지난 16일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앞으로도 특약 평론가 신분으로 글을 계속 쓰겠다고 한다. [중국 바이두 캡처]

후시진은 당대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언론인이다. 웨이보 팔로워만 20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중국 최고의 국제 전문가 팔로워가 잘해야 30만 정도인 걸 고려하면 엄청난 숫자다. 그는 국내에도 ‘거친 입’의 소유자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한국이 술에 취한 듯하다” “한국을 손봐줄 필요가 있다” “한국이 김치만 먹어서 멍청해진 것 아니냐” 등 일반 저널리스트의 품격은 찾아볼 수 없는 막말로 악명이 높다. 그러나 중국에선 ‘사이다 발언’으로 인기를 누려왔다.
후시진의 성장사는 환구시보의 발전사와 궤를 같이한다. 환구시보는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자회사로 1993년 1월 ‘환구문췌(環球文萃)’라는 주간 신문으로 시작했다. 창간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때맞춰 분 중국의 개혁개방 바람을 타고 중국 독자에게 외국의 선진 경험을 알린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쥐꼬리만 하던 인민일보 국제부 기자의 수입을 늘리기 위한 방편이었다. 시장경제 바람이 불던 당시 기자는 많은데 지면은 부족하자 이들 기자의 여유 기사를 환구문췌에 게재하고 원고료 지급에 나섰던 것이다.

1993년 ‘환구문췌’라는 주간 신문으로 출발해 97년 ‘환구시보’로 이름을 바꾼 뒤 주로 미국과 일본, 대만을 때리는 기사로 중국 독자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중국 바이두 캡처]

1993년 ‘환구문췌’라는 주간 신문으로 출발해 97년 ‘환구시보’로 이름을 바꾼 뒤 주로 미국과 일본, 대만을 때리는 기사로 중국 독자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중국 바이두 캡처]

한데 이게 호시절을 맞아 대박이 났다. 1989년의 천안문(天安門) 사태 후유증에서 벗어나고자 92년 덩샤오핑(鄧小平)이 광둥(廣東)성 등 남쪽 지방을 돌며 다시 한번 개혁개방을 역설한 남순강화(南巡講話) 이후 중국에선 국제 뉴스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게다가 필자가 인민일보 해외 특파원들이다 보니 글이 수준 높았다. 97년엔 ‘환구시보’로 이름이 바뀌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이 역시 시절을 탔다. 그해 7월 1일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며 중국을 엿보던 홍콩의 크고 작은 언론사 상당수가 역할을 상실한다.
과거 중국은 해외 반응을 떠보기 위해 홍콩 언론에 이런저런 뉴스를 흘렸다. 홍콩 반환 이후 이런 역할을 환구시보가 점차 떠맡기 시작했다. 이른바 ‘죽의 장막’이 쳐진 중국의 속내를 알아보기 위해선 뜻 모를 정치 용어가 난무하는 인민일보보다 대중의 언어로 소식을 전하는 환구시보가 편했다. 환구시보의 상술 또한 적중했다. 미국과 일본, 대만을 혼내는 소식으로 1면을 장식해 중국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독자가 급증하자 환구시보는 2001년 주 2회 발행하다가 2003년엔 주 3회, 2006년 주 5회를 거쳐 2011년부터는 월~토요일 주 6회 내는 일간지가 됐다.

환구시보의 영향력이 커지자 중국 당국은 2009년 4월 환구시보에 영자지 글로벌타임스를 창간시킨다. 대외적으로 중국의 목소리를 높이겠다는 것이었다. [중국 바이두 캡처]

환구시보의 영향력이 커지자 중국 당국은 2009년 4월 환구시보에 영자지 글로벌타임스를 창간시킨다. 대외적으로 중국의 목소리를 높이겠다는 것이었다. [중국 바이두 캡처]

89년 인민일보 국제부에 입사한 후시진은 97년 환구시보 부편집인을 거쳐 2005년 편집인이 되며 이 같은 환구시보의 성장을 직접 이끈 인물이다. 환구시보는 인민일보의 자회사로 사장이 없고 편집인이 제일 높은 자리다. 중국의 이론지인 광명일보(光明日報) 역시 편집인이 제일 높다. 후시진은 바로 환구시보의 1인자인 편집인으로 16년을 지냈다. 그렇게 올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잘했기 때문이다. 상업적인 후각과 정치적인 감각을 십분 활용해 중국 공산당 입장을 옹호하면서 수익도 많이 창출했다.
덩달아 매체로서의 환구시보와 언론인으로서의 후시진 모두 급성장했다. 2009년엔 영자지인 ‘글로벌타임스’까지 창간했고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집권 이후엔 더욱 순풍을 탔다. 후시진의거칠지만, 직설적인 화법이 시진핑 주석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시진핑의 칭찬 아래 중국 언론계에선 한때 ‘후시진 배우기’ 바람이 불었을 정도다. 그러나 중국 지식계의 평판은 냉정했다. 중국 외교학원 원장을 지낸 우젠민(吳建民)이후시진은 “전체 큰 그림을 보지 못한다”며 공개적으로 비판한 건 유명하다. 물론 후시진이 기가 죽을 리 없다. 그는 “우젠민 대사야말로 그저 외교만 아는 전형적인 비둘기파”라고 반박했다.

후시진의 불륜 의혹을 고발한 돤징타오는 1990년대 초반 환구시보에 입사해 이후 광고 파트에서 성과를 올리며 부편집인 자리에까지 올랐다. [중국 바이두 캡처]

후시진의 불륜 의혹을 고발한 돤징타오는 1990년대 초반 환구시보에 입사해 이후 광고 파트에서 성과를 올리며 부편집인 자리에까지 올랐다. [중국 바이두 캡처]

중국 일각에선 후시진을 중국을 그릇된 방향으로 인도하는 ‘10대 악인’ 또는 ‘4대 악인’ 중 하나라고까지 성토했다. 하지만 후시진은 언론인은 두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사람과 문장이 중후한 학자형이고 다른 하나는 용기를 가진 실천형 인물이라며 자신은 학자의 기질은 없으니 그저 실천형 기자로 앞으로 나아갈 뿐이라고 맞섰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초 그는 불륜의 혼외자 논란에 휩싸이며 큰 타격을 받았다. 자신의 바로 아래 있던 부편집인 돤징타오(段靜濤)가후시진을 당중앙 기율위원회에 실명으로 고발한 것이다.
“후시진이 겉으론 착한 척하며 애국을 소리 높여 외치지만 실제론 교만하며 황음(荒淫)무도한 데다 부패하고 타락했다”며 후시진이 사내 동료 두 명과 장기간 부당한 관계를 가져 두 사람 모두와의 사이에 각각 한 명씩의 사생아를 두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 사건은 최근 펑솨이(彭帥) 미투 사건처럼 중국특유의 유야무야 방식으로 흐지부지됐지만 후시진에게 결정타를 안긴 것으로 보인다. 이에 지난 여름부터 인민일보 국제부 부주임 우치민(吳綺敏)이 환구시보에 진주해 후시진으로부터 업무 인수인계 작업을 벌이고 있다는 말이 돌았다. 그리고 이제 후시진의 퇴진이 공식화한 것이다.

환구시보의 신설된 초대 사장에 취임한 판정웨이. 1980년생으로 인민일보에서 사설이나 중요 평론을 써 왔다. [중국 바이두 캡처]

환구시보의 신설된 초대 사장에 취임한 판정웨이. 1980년생으로 인민일보에서 사설이나 중요 평론을 써 왔다. [중국 바이두 캡처]

한데 여기서 주목할 건 우치민이후시진의 뒤를 이어 환구시보 편집인이 됐지만, 환구시보가 편집인 자리 위에 새로 사장을 두기로 했다는 점이다. 환구시보의 격과 비중이 높아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장엔 후시진보다 무려 스무 살이 어린 80년 출생, 즉 MZ 세대에 해당하는 판정웨이(范正偉)가 임명됐다. 배경엔 환구시보의 정치적 입장을 보다 공고하게 다지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따른다. 베이징대학 중문과 학사를 거쳐 베이징대학 법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판정웨이는 한 문장 한다는 말을 듣는다. 국가 중대사가 있을 때 인민일보가 내놓는 이른바 ‘인(런)민일보 중(중)요한 평(핑)론’이라는 뜻을 가진 ‘런중핑(任仲平)’ 필진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는 인물이다.
2014년에 쓴 ‘진실을 구하는 게 승리보다 낫다’는 평론은 그해 10대 평론 중 하나로 꼽히는 등 아홉 차례 걸쳐 각종 중국 신문상을 받았다. 특히 2016년 2월 19일 시진핑 주석이 인민일보와 신화사, CCTV 등 중국의 3대 주요 매체 인사들과 좌담회를 가졌을 때 판정웨이가 36세의 젊은 나이로 시진핑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대표 보고’를 한 사건은 유명하다. 당시 그는 시진핑이 자주 쓰는 말인 “땅강아지 소리에 농사짓지 않겠다(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뜻)고 해선 안 된다”는 말을 인용해 시 주석의 공감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에겐 젊고 겸손하며 준수하지만 일에는 조금의 빈틈도 없다는 말이 따라다닌다.

판정웨이는 인민일보 칼럼니스트로 있던 지난 2016년 36세의 젊은 나이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주재한 미디어 좌담회에 참석해 중국 언론과 관련한 대표 보고를 해 유명하다. [중국 바이두 캡처]

판정웨이는 인민일보 칼럼니스트로 있던 지난 2016년 36세의 젊은 나이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주재한 미디어 좌담회에 참석해 중국 언론과 관련한 대표 보고를 해 유명하다. [중국 바이두 캡처]

후시진과는 풍격이 다르다. 후시진이 감정적으로 거칠게 중국의 이익을 대변했다면 판정웨이는 보다 논리적이고 세련된 말로 애국주의를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판정웨이는 언론인이 갖춰야 할 3대 의식을 말한다. 글로벌 의식과 문제의식, 그리고 한계를 아는 분수의식이다. 후시진의 거친 입은 중국 내 많은 사람을 열광시켰을지 모르나 국제적으로는 엄청난 반감을 샀다. 이제 환구시보의 1인자가 된 판정웨이가 어떻게 환구시보를 이끌지 관심이다. 한데 한 가지 기억할 건 후시진이 완전히 퇴장한 건 아니란 점이다. 후시진은 편집인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특약 평론가로 계속 글을 쓰겠다고 한다. 혹시 거친 언어와 세련된 언어의 양동 작전이 펼쳐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중국 애국주의 신문 환구시보 1인자 후시진 편집인 사직 #신설된 환구시보 초대 사장에 1980년생 판정웨이 취임 #거친 막말로 국제적 반감 사던 제작에 변화 있을지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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