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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는 스펙트럼 다양한 우주, 질적으로 높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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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8호 29면

세계서 인정받는 한국 시

지난 21일 시카다 상을 받은 시인 김혜순씨. 동아시아 시인에게 주는 상이다. 왼쪽은 다니엘 볼벤 스웨덴 대사. [사진 주한스웨덴대사관]

지난 21일 시카다 상을 받은 시인 김혜순씨. 동아시아 시인에게 주는 상이다. 왼쪽은 다니엘 볼벤 스웨덴 대사. [사진 주한스웨덴대사관]

시인 김혜순(66)은 지구촌 인간들의 모든 구멍이 실은 하나로 연결돼 있다고 여긴다. 우리 엉덩이는 하수구와 맨홀에, 코와 입은 바이러스가 가득 찬 공기에 직접 맞닿아 있지 않느냐는 거다. 피부 껍데기 색깔이나 피의 순도를 따져 아무리 인종과 민족을 가르고 나눠봤자 결국 우리 항문 아래 파이프는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생각이다. 계간 문예지 악스트 최근호에 발표한 산문 ‘딸꾹질 전문가들’의 내용 일부다.

본질을 꿰뚫는 근본주의적인 시선, 거침없는 상상력이 문학의 서구 중심주의를 뒤흔드는 것일까. 시인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최근 몇 년 새 부쩍 커지는 모양새다. 2019년 캐나다의 권위 있는 그리핀 시 문학상(Griffin Poetry Prize)을 받은 데 이어  최근에는 스웨덴의 시카다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뿐 아니다. 그리핀상 수상작인 시집 『죽음의 자서전』(문학실험실)은 한국 시집으로는 처음으로 최근 덴마크에서 번역·출간됐다. 시인은 “스웨덴어로도 곧 출간되는데 내년 초 덴마크와 스웨덴 출판사가 합동으로 내 시집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지난 21일 서울 성북동 스웨덴 대사관저에서 열린 시카다상 시상식에서다. 이쯤 되면 물어야 한다. 왜 김혜순인가. 그의 시를 둘러싸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먼저 타자의 평가. 다니엘 볼벤 스웨덴 대사는 시인에게 시카다상을 건네며 이런 말을 했다.

“『Autobiography of Death(죽음의 자서전)』의 몇 구절을 두고 아내와 서로 자기 해석을 내세웠다. 다양한 감상의 여지가 있는 훌륭한 작품이다. 이런 시집으로 한국 현대시에 입문할 수 있게 해줘 감사하다.”

『죽음의 자서전』은 세월호 등 사회적 죽음을 다룬 49편을 묶은 시집이다. 어쨌든 시인의 시가 쉽지는 않다는 얘기다. 한국문학번역원 곽효환 원장은 “이번 수상으로 김혜순 시인의 시가 더 많은 바깥을 만나 더 넓은 세계에서 소통되기를 기대한다”고 덕담했다.

정작 시인은 현실적이었다. 수상 소감 도중 “(코로나로 인한)자발적 혹은 비자발적 봉쇄 속에 있으면서도 하루 세끼 챙겨 먹고 잠자고 일어나는 일을 반복하면서, 우리는 과연 반복의 영웅들일까 아니면 반복의 거지들일까를 생각한다”고 했다. 유례없는 봉쇄의 시대에 문학은 무엇이고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이고 시는 무엇인지 고민스럽다는 얘기였다.

시카다상이어서 더 기분 좋은 게 있나.
“더 기분 좋은 게 있지 않았는데 어떡하지. 재작년 그리핀상은 너무 기뻤다. 세계 시인들에게 주는 상이고, 이전에 상을 받은 사람들이 내가 평소 너무 좋아하는 시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내년 초 세미나를 여는 스웨덴·덴마크 출판사에 시카다상 받게 됐다고 메일 보냈더니 무척 반가워했다.”

시카다상은 스웨덴의 노벨상 수상 시인 하뤼 마르틴손을 기리기 위해 2004년 제정된 상이다. 동아시아 시인에게 주어진다. 한국 시인이 받기는 문정희·신경림·고은에 이어 김씨가 네 번째다.

어떤 점에서 이런 관심을 받고 있다고 보나.
“캐나다든 북유럽이든 우리나라보다는 내 시를 더 잘 이해하는 것 같다. 시에 대해 오픈 마인드라는 느낌이다. 매체 서평이나 분석 글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감상능력에 차이가 존재하는 걸까.
“우리는 아직도 시에 대한 고정관념이 강한 것 같다. 특히 유행에 휩쓸린다. 뚜렷한 주관이나 취향이 부족해서다. 우리처럼 1000만 영화가 많은 나라도 없을 거다. 100만 명이 10개 영화를 보는 게 좋은 일이듯이 문학도 한 권이 몇십만 부 팔리기보다 3만 부짜리 10권이 팔리는 게 건강한 거다.”
독자들에게 다양하게 보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결국 문학 교육의 문제다.”
이제는 한국문학의 해외 소개가 낯선 일이 아닌데.
“요즘 미국에 이상하게 시의 붐이 일고 있다. 한국시도 굉장히 많이 소개된다. 이원·김민정, 심지어 문보영 같은 젊은 시인까지 소개된다. 김행숙 시인 시집도 번역 중이다. 모두 여자 시인이라는 점이 특이하지만 미국 매체에서 한국시를 많이 다룬다.”
왜 그런다고 생각하나.
“한국시가 질적으로 높다. 스펙트럼이 무척 다양한 굉장한 우주다. 그런 점을 시인들 빼고 한국 사람들 아무도 모르지만, 그런 굉장한 우주를 가져가니까 놀라는 거다.”
시는 여성의 장르인가.
“여자들은 대부분 리젝트를 당해본 자리에서 시를 쓴다. 철학적으로, 존재보다는 부재의 자리, 거절당한 자리에서 시를 쓴다는 얘기다.”
여성주의적인 목소리를 내면서도 유머가 바탕에 깔린 작업을 해왔는데.  
“위트나 유머마저 없으면 누가 내 말을 듣겠어.”
독자를 위한 배려인가.
“문학이 원래 당의정을 바르는 장르다. 당의정이 위트다.”
어떤 인터뷰 보니까 앞으로 노벨상 받는 거 아니냐는 질문에 핀잔 섞인 답을 했던데.
“전 세계에 잘 쓰는 시인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세계의 좋은 시 다 읽어 보면 ‘우리나라는 언제’, 이런 말 못 한다.”
시 쓰기는 어떤 의미인가.
“내게는 정적으로 무언가를 그린다기보다는 하나의 행위, 수행(遂行·perform)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 큰 소용 없겠지만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는 행위이기도 하다.”
비극적인 상황에서 고통받는 건 결국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지금 시는 어디 있는 거야. 시는. 이럴 때일수록 구체적 현실, 소소한 자기 얘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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