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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정치적 약속이 의외의 피해 만들 가능성 없는지 살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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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미국이 필리핀 아닌 타이완 점령했다면

박태균의 역사와비평

박태균의 역사와비평

마닐라 전투를 기억하시나요?

2021년 2월 더 디플로매트(The Diplomat)라는 저널에 ‘76년 후 마닐라 전투를 기억하며’와 ‘1945년 마닐라의 파괴는 피할 수 있었나’라는 제하의 글이 게재되었다.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여행지의 하나이자, 한국과 함께 1980년대 중후반 민주화를 이루었던 필리핀이 왜 2차 세계대전 중 역사적 무대가 되었을까?

진주만에서 시작된 아시아 태평양에서의 전쟁이 막바지로 가고 있었던 1944년 7월 28일,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전쟁이 시작된 하와이에서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략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는 리히 육해군 최고사령관 참모장, 니미츠 태평양함대 총사령관, 그리고 맥아더 남서태평양 지역군 사령관이 참여했다. 군사전략 문제로 맥아더와 갈등을 빚고 있었던 킹 미 해군작전부장(해군참모총장)을 제외한 군 최고 수뇌부가 참여한 회의였다.

루스벨트, 일본 항복 얻어내기 위한 작전 루트 회의 소집
타이완은 보급물자 차단, 필리핀은 미국 위신 세우기에 유리
“필리핀 진격, 잘못된 판단” 지적도 … 민간인 무차별 학살 탓
정치적 목적이 중요하게 작동됐을 합리적 의심도 가능해

이 회의는 일본의 마지막 항복을 받아내기 위한 작전 루트를 논의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건강이상설이 제기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던 루스벨트는 4번째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전쟁 상황에서 대통령이 군 수뇌부와 함께 건강하고 자신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사기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었다.

타이완으로 가자는 해군

괌과 사이판을 포함한 마리아나 제도를 점령하면서 일본의 절대국방권을 허문 미 해군은 그 기세를 몰아 타이완을 점령하자고 주장했다. 절대국방권은 일본이 자신들의 최후 방어선으로 설정한 지역으로, 동쪽으로 마리아나 제도에서 서쪽으로 미얀마와 싱가포르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이었다.

미 해군이 타이완 점령을 주장했던 이유는 석유를 비롯한 전쟁물자 보급기지가 되어 있는 동남아시아로부터 일본으로 이어지는 보급선을 끊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의 경제제재를 전쟁 개시의 명분으로 삼았던 일본에 동남아시아로부터의 보급선을 끊는 것은 전쟁을 빠르게 끝내기 위한 가장 효율적 방안이 될 수 있었다.

타이완 점령은 중국 전선에서 중국 국민당군에 힘을 실어주는 또 다른 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중국 전선에서 연합군이 우세해진다면 한반도로의 진공도 추진할 수 있었다. 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SS)은 한국의 광복군을 이용한 한반도 진공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는 일본 열도를 동서로 공격할 수 있는 방안이었다.

이 작전이 실행되었다면, 일본 항복 직전 소련의 군대가 한반도에 진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제주도를 불침항모의 기지로 삼고자 했던 것도 이러한 작전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필리핀으로 가자는 육군

맥아더 사령관은 해군의 계획에 반대했다. 맥아더는 ‘돌아오겠다’(I shall return.)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맥아더에게 필리핀 회복은 자신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서의 생명이 걸린 중요한 목표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 자신의 첫 치욕적 패배에 대한 설욕이었고, 필리핀의 회복이 미국의 세계적 위신에도 중요하다는 것이 맥아더의 주장이었다.

맥아더의 주장은 해군의 주장을 위해서도 중요했다. 일본이 필리핀에 43만의 대군을 주둔시키고 있었고, 동남아시아의 해군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 대륙에도 관동군을 비롯한 일본 육군이 중국 국민당군을 압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미군이 필리핀이라는 보급기지 없이 타이완을 점령할 경우 고립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이 결정적 순간, 루스벨트는 맥아더의 손을 들어주었다. 신속한 전쟁의 종결을 위해 도박을 할 수 없었다. 전쟁의 상황이 안 좋아질 경우 루스벨트 역시 정치적으로 위기를 맞을 수도 있었다. 1929년 대공황의 상황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루스벨트에 대한 지지율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맥아더의 손 들어준 루스벨트 대통령

루스벨트에게는 맥아더와의 정치적 타협도 중요했다. 맥아더는 군인이자 정치인이었다. 1935년 군을 떠난지 6년 후 현역으로 다시 복귀하였지만, 1930년대 민주당 정부의 군축을 반대할 때부터 공화당의 차기 지도자로 주목받고 있었다. 대선을 앞두고 있는 루스벨트에게 군 지도자이자 정치적 라이벌과의 대립이 결코 반가울 리 없었다.

회의의 결과 미국은 타이완으로 직진하는 대신 필리핀에서 해상 결전과 상륙작전을 실시했다. 이로 인해 타이완을 통해 중국의 일본군을 압박하고, 광복군과 함께 한반도 진공작전하는 계획은 철회되었다. 그 결과 한반도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한반도가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의 참화로부터 비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남한에는 필리핀 전투에 참여했던 미 24군단이 진주했다.

2021년 2월 더 디플로매트에 실린 글은 마닐라 전투에 주목하면서 필리핀 진격을 잘못된 선택으로 판단했다. 맥아더의 작전은 필리핀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특히 마닐라는 베를린·바르샤바와 함께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시가전으로 가장 많이 파괴된 도시의 하나가 되었다. 1945년 2월 진행된 한달 간의 전투과정에서 일본군은 미군에 협력할 가능성이 있는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했다. 6000여 명의 미군 사상자와 1만6000명이 넘는 일본군 사망자, 그리고 적게는 10만에서 많게는 24만에 달하는 필리핀 민간인들이 사망했다.

필리핀에 발목잡힌 미국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도 미국은 필리핀을 완전히 탈환하지 못했다. 필리핀에서 발목을 잡힌 미국은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할 때까지도 태평양에서의 전쟁이 언제 끝날지 예측할 수 없었다. 결국 빠른 종전을 위해 미국은 인간에게 사용해서는 안 될 무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미국은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를 얻었지만, 그 승리는 온전히 정의로운 것은 아니었다. 물론 타이완으로 직진했다면, 전쟁이 더 일찍 끝났을 수도 있었고, 한반도가 분단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타이완과 한국에서 엄청난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다.

전범재판이 시작되면서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되었다. 전범들을 처벌해야 하지만, 연합국의 반격과정에서 발생한 대규모 민간인 피해에 대한 책임의 문제였다. 독일의 드레스덴을 비롯해 많은 주축국 도시에서의 전투와 폭격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그 궁극적인 책임은 전쟁을 일으킨 군국주의자들에게 있겠지만, 피해자를 줄일 수 있는 효율적인 작전이 실행되지 못한 책임은 면제될 수 있을까?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위험하건만

만약 미국이 필리핀을 패스하고 타이완으로 향했다면 역사적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역사에서 ‘만약’은 추측만이 가능할 뿐 정확한 답을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직접 증언할 수 있는 그 누구도 생존해 있지 않은 상황이지만, 하와이 회의 전후 상황을 고려한다면 최종 결정에 정치적 목적이 중요하게 작동되었을 합리적 의심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정치적 결정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당하지 않았어도 될 피해를 입었던 것은 아닐까?

한국 사회는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중요한 변곡점에 서 있다. 이 시점에서 미래의 지도자로 누구를 선택해야 할까? 그들의 정책이 국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정치적 목적으로 내놓은 약속이 많은 국민들이 받지 않아도 될 피해를 만들어낼 가능성은 없는가?

2008년 하버드 대학 졸업식에서 해리포터의 작가가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린다. “앞으로 리더가 될 가능성이 높은 당신들이 그 자리에서 어떤 결정을 하기 전에 자신의 결정이 일반 국민과 개발도상국의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30초만 생각해 달라.” 네거티브만 판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들의 신중한 선택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