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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퍼스펙티브

한국에도 ‘잃어버린 20년’ 오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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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초저금리 속 부풀어 오른 집값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12년, 2015년, 2019년은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일본처럼 ‘잃어버린 20년’이 찾아오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쏟아진 것이다. 당시의 저성장·저물가·과잉 부채 등이 일본과 닮았기 때문이다. 물론 근본적인 공통분모는 저출산·고령화이었다. 2015년엔 KDI(한국개발연구원)까지 “인구구조와 경제의 모든 관련 지표가 20년의 시차를 두고 일본을 따라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다행히 한국 경제는 그때마다 ‘재패나이제이션(Japanization·일본화)’의 저주를 피해갔다.

문제는 땜질식 대증요법이 반복됐다는 점이다. 구조 조정이나 체질 개선 같은 고통스럽지만 근본적 처방은 없었다. 금리 인하, 환율 상승, 재정 확대라는 강력한 모르핀 주사만 놓았다. 그 결과 잠시 위기를 넘기면 가계부채와 국가 부채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경제에는 마법이나 기적이 따로 없다. 이번에도 한국판 ‘잃어버린 20년’이 유예된 것은 마찬가지다.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초저금리와 천문학적 재정 살포로 2년의 시간을 넘겼을 뿐이다.

다시 고개 드는 한국판 거품론
주택 값 급등과 압축적 고령화
30년 전보다 글로벌 환경 나빠져
일본의 실패에서 배워야 할 때

압축적 고령화와 인구 재앙

이철호의 퍼스펙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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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들은 악화하고 있다. 저출산·고령화는 불가역적인 구조로 굳어져 버렸다. 일본에서 20년에 걸쳐 일어난 고령화가 한국에선 10년 만에 압축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소멸할 나라’라는 불명예와 함께 지난해 합계 출산율이 0.84명으로 떨어졌다. 세계 꼴찌다.

일본의 변곡점은 1990년이었다. 주식·부동산 거품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공교롭게 같은 해 일본의 생산가능 인구도 정점을 찍었다. 이후 생산가능인구 감소에 따라 노동 생산성이 하락하고 저축과 투자가 위축돼 갔다. 2006년엔 65세 인구가 전체의 20% 이상인 ‘초고령 사회’로 진입했다. 복지 지출이 급증하면서 국가 채무도 급 팽창했다.

한국은 2019년 생산가능 인구가 처음으로 감소했다. 2020년엔 인구 자체가 감소했다. 사망자가 출생자보다 많아 3만3000명의 인구가 줄어든 것이다.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아닌 한 인구의 자연 감소는 인구 재앙이나 다름없다. 사회는 활력을 잃고 경제의 역동성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뿌리째 흔들리는 반론

그동안 한국판 ‘잃어버린 20년’의 가능성을 부인해온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은 근거를 댔다. 한국은 일본에 비해 자산가격 상승 폭이 크지 않고, 기업의 투기적 부동산 매입이 적으며, 가계의 실소유 목적의 부동산 투자가 많다는 반론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지난 4년간 이런 믿음이 뿌리째 뒤집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주택 가격 상승폭이 1980년대 일본에 버금가는 수준이 됐다.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격은 2017년 5월 6억708만원에서 올해 10월 12억1639만원으로 두배 이상 치솟았다. 여기에다 ‘영끌’ ‘빚투’로 가계의 투기적 부동산·주식 매입이 기승을 부렸다. 금리가 오를 경우 일본처럼 부동산·주식 거품이 붕괴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가장 위험한 폭탄, 가계부채

가계 부채는 위험한 뇌관이다. 거품 시절 일본은 부동산 담보가액의 120%까지 대출해 주는 모럴 해저드에 빠졌다. 과잉 대출은 버블을 낳았다. 이에 비해 한국은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을 60% 선에서 억제하고 있다. 하지만 가계대출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9월 말 기준 1846조원으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103%의 위험 수준이다. 선진국 평균 75% 선을 뛰어넘는다. 국제결제은행은 한 국가가 감내할 수 있는 가계부채 수준을 GDP 대비 85% 선으로 보고 있다.

당연히 나라 안팎에서 가계부채 경보음이 요란하다. 무디스는 지난달 “코로나로 가계 부채가 급격히 늘어난 상황에서 금리 인상까지 겹치면 금융권의 자산 건전성을 위협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은행도 “코로나 이후 가계 빚 증가 폭이 선진국의 3배에 이른다”며 “우리나라의 경우 2000년대 초반 카드 사태 이후 16년간 단 한 번도 디레버리징(deleveraging·부채 축소) 없이 가계부채가 누적돼 왔다”고 지적했다. 전 세계적으로 이례적인 현상이며 집값 폭락의 위험 역시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3B와 3D, 나빠진 글로벌 환경

일본의 거품과 붕괴 과정은 ‘3B’로 설명된다. 80년대 후반 붐(boom)이 일어나, 거품(bubble)이 형성됐으며, 급격한 금리 인상에 따라 붕괴(bust)하는 과정을 밟은 것이다. 이후 장기 불황에 진입하는 과정은 ‘3D’로 요약된다. 부채 누적(debt)-고통스러운 부채 및 대출 조정(deleveraging)-디플레이션(deflation)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은 3대(고용·설비·채무) 과잉에 시달리면서 투자가 실종됐고 소비도 부진에 빠졌다. 한국도 미리 3B와 3D를 막아야만 잃어버린 20년을 피할 수 있다.

그나마 일본의 거품이 붕괴한 1990~ 1995년 세계 경제는 비교적 탄탄한 편이었다. 지금은 전 세계적 부채의 역습이 시작될 조짐이다. 래리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은 “욕조에 너무 많은 물을 부으면 물이 넘치기 마련”이라며 코로나 사태 이후 심각한 인플레이션과 부채 쓰나미를 예고했다. 실제로 올해 말 미국의 국가 부채는 GDP 대비 102%에 이를 전망이다. 2차 대전 이후 최고 수치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전 세계 정부 부채도 3년 전 GDP 대비 88%에서 105%로 치솟았다. 그만큼 글로벌 경제의 기초체력이 나빠졌다.

경계해야 할 중국발 역풍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뒤에는 중국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1985년 플라자 합의로 달러화 가치가 떨어지자 중국은 수출 경쟁력 확보를 위해 위안화 가치를 떨어뜨렸다. 특히 94년 1월에는 관리변동환율제 도입을 명분으로 불과 한 달 만에 달러당 5.8위안에서 8.73위안으로 무려 49.8%나 평가절하시켜 버렸다. 이후 중국은 압도적인 수출가격 경쟁력으로 세계 제조공장이 됐다.

하지만 주변 경쟁국들은 삼중고를 겪었다. 우선 수출에서 중국에 밀려났다. 둘째, 기업들이 싼 임금을 찾아 중국으로 떠나면서 산업 공동화 현상이 일어났다. 셋째, 값싼 중국산 수입품 때문에 디플레이션 압력도 높아졌다.

이번에는 정반대의 중국발 역풍이 불고 있다. 지난 10년 사이 중국의 임금이 6배나 뛰면서 전 세계에 인플레 요인이 된 것이다. 여기에다 헝다 파산 등 세계 경제의 불안을 부추기는 불씨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 사흘 전에는 중국 인민은행이 금리를 인하하자 전 세계 증시가 곤두박질쳤다. 주요국들이 인플레에 맞서 금리를 올리는 마당에 중국은 금리를 내려야 할 정도로 경제가 심상치 않다는 징조로 받아들인 것이다. 어느새 중국은 글로벌 경제의 전략적 자산에서 전략적 부담으로 바뀌어 버렸다.

피하 지방 넉넉한 일본과 빈약한 한국

일본이 잃어버린 20년을 버텨낸 것은 기초체력이 탄탄했기 때문이다. 국내 기관이 보유한 국채 비중이 90%로 높은데다 순 채권국의 지위가 확고했다. 그 덕분에 일본은 엄청난 재정적자에도 자본 유출의 공포에 시달리지 않았다. 순 외화 자산은 253조엔(3조1900억 달러)이나 돼 무역수지에서 적자가 나도 전체 경상수지는 넉넉한 흑자를 유지했다. 한마디로 외환위기 걱정이 없었다.

경제학 용어로 가처분 소득에서 소비를 뺀 비율을 순 저축률이라고 한다. 일본은 1991년 개인 순 저축률이 15.9%였는데 10년 후 3.7%로 하락하였다. 이는 기나긴 불황 동안 일본 국민이 저축을 줄여 소비를 충당했다는 의미다. 이에 비해 한국의 순 저축률은 2.7%에 불과하다. 저축을 줄여 소비로 충당하기 쉽지 않다는 뜻이다. 경기 침체로 소득이 감소하면 언제 소비 감소·가계 파산·불황 심화의 악순환에 빠질지 모른다. 한마디로 일본은 겨울잠을 자도 버틸 만큼 피하 지방이 축적됐던 반면 한국 경제의 피하지방은 빈약하다는 의미다.

‘잃어버린 2~3년’으로 멈추게 해야

한국이 ‘잃어버린 20년’을 맞지 않으려면 미리 부동산·주식 거품에서 바람을 빼야 한다. 경착륙 대신 연착륙을 도모해야 고통과 충격을 덜 수 있다. 만에 하나 거품이 붕괴하고 저성장이 급습하면, 문제는 정책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금리를 더 이상 내리기도 어렵고 정부 빚 부담 때문에 재정 확대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 경기 부양의 약발이 떨어지는 것이다.

다시 한번 2015년 KDI가 제시했던 처방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과거 20여년간 양적 완화, 제로금리 등 수많은 극약처방을 동원했다. 하지만 토건 사업 등은 별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연구·개발(R&D)과 기술 교육에 대한 투자가 효과를 거둔 것으로 나타났다. KDI도 이런 인적 자본에 과감히 투자해야 한국 경제의 위기를 ‘잃어버린 2~3년’으로 단축시킬 수 있다고 제안했다. 어느 때보다 금융·재정 정책의 효율을 분석해 선택과 집중이 절실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