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체첸 반군 지도자 암살 사건과 관련해 러시아 정부가 20일(현지시간) 독일 외교관 2명을 추방하기로 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보도했다. 앞서 독일 외교부가 이번 사건을 “중대한 주권 침해”로 규정하고 러시아 외교관을 추방한 데 대한 맞보복 성격이다.
FT에 따르면 러시아 외교부는 이날 주러 독일 대사관 소속 2명의 외교관을 ‘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외교상 기피 인물)’로 지정한다고 발표했다. 외교상 기피 인물로 지정되면 해당 영토를 떠나라는 의미가 있다. 러시아 외교부는 “베를린이 앞으로도 우리를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면, 러시아는 변함없이 비례해 대응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외교 갈등으로 인해 이달 출범한 독일 새 정부와 러시아는 시작부터 삐걱거리는 출발을 하게 됐다.
대낮 영화같은 살인 사건, 배후엔 러시아
이번 사건은 20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8월 23일 낮 독일 베를린 중심부인 클라이너 티어가르텐 공원에서 한 남성이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한 채 발견됐다. 이 남성은 러시아 연방 체첸 공화국 출신 젤림칸 칸고슈빌리(당시 40세). 그는 인근 이슬람 사원에서 열린 금요 예배 참석차 공원을 지나는 길이었다.
대낮에 벌어진 살인 사건에 독일 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수사 결과 범인은 러시아 국적의 바딤 크라시코프(56)로 밝혀졌다. ‘솔로코프’라는 가명을 쓴 그는 위조 여권으로 신원을 속여 독일에 입국한 것으로 드러났다. 크라시코프는 자전거를 타고 칸고슈빌리의 뒤에서 빠르게 접근, 소음기를 단 권총을 두 발 발사해 그를 살해했다.
사망한 칸고슈빌리는 2차 체첸 전쟁(1999~2009년)에서 러시아에 독립을 요구하며 투쟁한 야전 사령관 출신이었다. 2016년부터 독일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 살고 있었다. 반면 러시아 연방정보국(FSB)의 데이터베이스에는 테러리스트로 올라 있는 인물이어서 그의 죽음은 초반부터 러시아 정보 기관 개입설이 불거졌다.
베를린 법원은 1년 간의 심리 끝에 지난 15일 이 사건을 “러시아 국가에 의한 테러리즘”으로 규정했다. 살인 혐의로 기소된 크라시코프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했다. 법원은 “크라시코프는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추가 공모자들과 함께 러시아 중앙 정부의 명령에 따라 피해자를 처형한 것”이라고 밝혔다.
법원 판결에 따라 독일 외교부는 즉각 “이번 사건은 독일 법과 주권에 대한 중대한 위반”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세르게이 네체프 러시아 대사를 초치해 항의하고, 대사관 소속 외교관 2명을 외교상 기피 인물로 통보했다. 앞서 독일과 러시아는 2019년 사건이 불거졌을 때도 수사 협조 문제 등을 이유로 각자 외교관 2명을 추방한 적이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칸고슈빌리 살해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칸고슈빌리를 “강도”라 부르며 “피에 굶주린 잔인한 사람”이라고 지칭하곤 했다.
우크라이나 위기에 외교 갈등까지…숙제 쌓이는 숄츠
FT는 이와 관련 “독일의 신임 올라프 숄츠 총리는 러시아와 대화를 재개하려 하지만, 계속해서 갈등을 일으키는 러시아에 대응하기 위한 씨름을 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숄츠 총리는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에 이어 지난 8일 취임했다.
숄츠 총리는 의회 취임 연설에서 러시아와 유럽연합(EU) 간 대화를 모색하기 위한 ‘새로운 동방정책(Ostpolitik)’을 제시했다. 최근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고조되는 군사 위기를 완화하기 위한 유화책이란 해석이 나왔다.
하지만 숄츠 총리의 제안이 무색하게 독일과 러시아는 외교·안보 전방위에서 난제에 직면해 있다. FT는 “아날레나 베어보크 신임 외교부 장관은 숄츠 총리에게 러시아·독일 간 직통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인 ‘노르트스트림2’ 가동 거부를 포함한 대러 강경 노선을 건의했다”고 전했다.
완공 상태로 가동이 멈춘 노르트스트림2은 러시아를 향한 제재 카드 가운데 하나로 빠지지 않고 거론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설로 촉발된 러시아와 서방 세계의 대치 상태가 장기화하면 할수록 독일로선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다. 동시에 겨울철 유럽의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고 있는 상황이라 숄츠 총리의 고심은 깊어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