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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발로 돌변, 투사 버린 이재명…포켓치프 꽂은 DJ 똑 닮았다

중앙일보

입력

김대중 전 대통령(왼쪽)이 대선 직후였던 1997년 1월 18일 KBS에서 열린 '국민과의 대화' 생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 모습.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오른쪽)의 중도 확장 행보에 대해 여권에선 “과거 김 전 대통령의 ‘뉴DJ 플랜’과 유사하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중앙포토, 임현동 기자.

김대중 전 대통령(왼쪽)이 대선 직후였던 1997년 1월 18일 KBS에서 열린 '국민과의 대화' 생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 모습.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오른쪽)의 중도 확장 행보에 대해 여권에선 “과거 김 전 대통령의 ‘뉴DJ 플랜’과 유사하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중앙포토, 임현동 기자.

“저는 실용주의자다. 맹목적으로 가치나 신념 이런 것에 국민의 삶이 희생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16일 인터넷 언론사 합동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다주택자 종합부동산세에 대해서도 정책 조정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그는 “예컨대 농가주택 500만원 짜리를 사서 가끔 이용하는데 2주택자가 돼, 농가주택 가격보다 더 비싼 세금이 서울 아파트에 부과되는 경우도 있다”며 “이런 건 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책의 궁극적 목표는 일관성 유지가 아니라, 국민의 삶을 어떻게 개선하는지에 집중해야 한다”는 게 그가 제시한 원칙이었다.

최근 이 후보는 꾸준히 ‘탈(脫)이념 실용주의’ 행보를 거듭하고 있다. ‘다주택자에 대한 징벌적 세제’의 틀까지 흔들며 민주당 내 금기를 뛰어넘는 광폭 행보에 “중도 확장이 아니라 변신에 가깝다”(수도권 민주당 의원)는 말까지 나온다.

당내 일각에선 “DJ의 실용주의 행보를 보는 듯하다”(중진 의원)는 말도 나온다. 1992년 대선 이후 정책적 유연성을 강조하면서 ‘경제 대통령론’을 앞세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뉴DJ 플랜’과 이 후보의 변신이 닮아있다는 것이다. 이 후보 역시 지난 2일 김대중도서관에서 동교동계 원로들과 만난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의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이 필요하다’는 말을 “제일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이고, 실제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꼽았다.

DJ는 ‘포켓치프’…이재명은 ‘흑발’로 변화 시작

지난달 21일 충북 청주시 상당구 육거리종합시장을 방문한 이재명 민주당 후보(왼쪽). 지난달 26일 전남 신안군을 방문한 모습(오른쪽)에서 머리색을 검게 물들이고, 귀 바로 위 옆머리를 짧게 친 변화가 눈에 띈다. 연합뉴스, 뉴스1

지난달 21일 충북 청주시 상당구 육거리종합시장을 방문한 이재명 민주당 후보(왼쪽). 지난달 26일 전남 신안군을 방문한 모습(오른쪽)에서 머리색을 검게 물들이고, 귀 바로 위 옆머리를 짧게 친 변화가 눈에 띈다. 연합뉴스, 뉴스1

“이 후보는 원래 실용주의자”라는 게 측근들의 주장이지만, 인권변호사 출신 이 후보의 이미지는 그간 ‘투사’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난 1년 8개월간 백발이던 머리카락 색깔을 검게 바꾼 지난달 25일 이후로 투사는 사라졌다.

이 후보는 지난달 29일 한 방송사 인터뷰에서 자신의 ‘국토보유세 신설’ 공약에 대해 “불신이 많고 오해가 많기 때문에 국민의 동의를 얻는 전제로 저희가 추진할 것”이라며 재검토를 시사했다. 지난달 29일 ‘D-100일’ 회의에선 “지금 이 순간부터 저의 목표는 오직 경제 대통령, 민생 대통령”이라고 선언했다. ‘투사’가 아닌 ‘경제 대통령’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재정립한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7년 12월 14일 SBS 탄현스튜디오에서 열린 대선후보 3자 TV토론회에 참석한 모습. 김 전 대통령은 1992년 이후 상의 주머니에 손수건을 꽂는 '포켓치프' 장식을 즐겨했는데, 이는 부드러운 이미지를 보이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 중앙포토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7년 12월 14일 SBS 탄현스튜디오에서 열린 대선후보 3자 TV토론회에 참석한 모습. 김 전 대통령은 1992년 이후 상의 주머니에 손수건을 꽂는 '포켓치프' 장식을 즐겨했는데, 이는 부드러운 이미지를 보이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 중앙포토

실용 노선을 전면에 내건 김 전 대통령의 ‘뉴DJ 플랜’도 역시 이미지 변화로 시작됐다. DJ는 1992년 대선부터 재킷 상의 주머니에 포켓치프(장식용 손수건)를 자주 꽂고 등장했다. 한손을 내려치는 연설 동작도 양손을 함께 쓰는 부드러운 제스처로 대신했다. 배기선 전 의원(당시 비서실 차장) 등 측근들이 DJ의 장단점을 분석해 부드러운 이미지 구축 전략을 세웠다고 한다.

외향에서 시작한 변화는 ‘경제 대통령론’과 통합 메시지로 이어졌다. DJ는 “다음 대통령은 경제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지도자여야 한다”며 경쟁자 YS(김영삼 전 대통령)와의 차별화를 시도했다. 대선을 100여일 앞둔 한 토론회에선 “과거를 따지는 정치를 해선 안 되고 할 수도 없다. 보복 없는 정치, 화해의 정치가 ‘뉴DJ 노선’”이라고 선언하며 영남권과 보수 세력에 손을 내밀었다.

영남 동진(東進)도 유사…DJ와 똑 닮은 ‘경제 대통령론’

당시 DJ는 영남에도 공을 들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1980년 ‘서울의 봄’ 이후의 첫 대학 강연을 1992년 5월 경남 마산 소재 경남대에서 개최한 것이다. ‘농가부채 감면’, ‘추곡수매가 14% 상향’ 등 주요 공약도 경남 김해와 진주에서 발표했다. ‘호남 대 비(非)호남’ 구도를 깨고 ‘DJ 대 YS’ 인물 구도를 앞세워 ‘똑똑한 대통령 뽑기’ 경쟁을 벌이기 위한 승부수였다고 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지난 11월 5일 오전 대구시 경북대학교 북문 인근에서 학생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이날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당 경선을 마무리짓고 후보로 확정된 날이었다. 뉴스1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지난 11월 5일 오전 대구시 경북대학교 북문 인근에서 학생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이날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당 경선을 마무리짓고 후보로 확정된 날이었다. 뉴스1

이 후보 역시 최근 대구·경북에 공을 들이고 있다. 대선 출마 선언 당일(7월 1일) 고향인 경북 안동을 찾았고,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선출된 지난달 5일엔 대구 경북대학교를 찾아 학생들과 만났다. 지난 10~13일 대구·경북 지역 일정에선 “박정희 전 대통령처럼 강력한 경제부흥정책을 취하고, 이를 통해 새 산업을 대대적으로 창출해내야 새 일자리가 생긴다”며 대구·경북 민심에 호소했다.

‘이재명 대 윤석열’ 인물론 구도 역시 이 후보가 29년 전 DJ만큼이나 원하는 구도다. “성남시장·경기지사를 거친 행정 경험이 부각되면 인물론 우위에 설 것”이라는 게 민주당 관계자들의 바람이다. 이 후보 역시 능력 대결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지난 15일 유튜브 방송에서 한 여성 네티즌이 쓴 “여성 우대정책 말고 남녀 둘 다 혜택을 볼 수 있게 해주세요. 지금 안 그래도 윤석열이 너무 멍청해서”라는 글을 소리 내 읽고는 “어. 이런 거 읽으면 안 되는데. 윤석열이 너무 땡땡해서 2030 설득이 잘 되고 있다”라고 말을 바꿨다.

다만 급격한 이미지 변신이 유권자들의 충분한 신뢰를 얻지 못하면 역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뉴DJ 플랜’의 벤치마킹 대상이던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유연한 캠페인 전략이 ‘교활한 디크(Tricky Dick)’란 별명으로 이어진 걸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이 후보의 변화 방향은 긍정적”이라면서도 “‘뉴DJ 플랜’은 5년간 길게 이어져 지지층도 따라왔지만, 이 후보의 변화는 그 속도와 양태가 다소 거칠다. 자칫하면 후보 신뢰성에 손상이 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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